중국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이 13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오른쪽)과 정상회담을 하기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베이징=석동률 기자
《노무현 대통령은 13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하고 북한 핵문제에 대해 논의했으나 단호한 대응책을 내놓지 못했다. 두 정상은 1시간 5분 동안의 단독 정상회담에 이어 확대 정상회담과 오찬까지 함께하며 3시간 동안 북한 핵문제 등 현안에 대해 논의했다. 이날 회담에 배석했던 한 참석자는 “두 정상이 주로 대화했고 다른 배석자는 거의 얘기가 없었다”며 “회담 분위기가 진지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날 두 정상이 내놓은 북핵 해법은 원론적인 수준을 넘지 못해 북한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 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 ‘한반도 비핵화’ 약속 준수 촉구
한중 정상은 이날 회담에서 “북한의 핵실험에 확고하게 반대하고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며 북한의 핵실험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어 양 정상은 북한에 △한반도 비핵화 약속 준수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일체의 행동 중지 △6자회담 복귀 등 3개항의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양 정상이 북한을 향해 ‘한반도 비핵화’ 약속을 준수하라고 요구한 것은 사실상 북한의 핵무기 폐기를 촉구한 것이다. 특히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일체의 행동을 중지하라’는 메시지에는 추가 핵실험에 대한 경고 메시지가 담겨 있다.
정부 관계자들은 두 정상의 메시지는 북한에 대한 통첩성 가이드라인이라고 설명했다. 송민순 대통령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은 “안정적인 비핵화는 (동북아) 정세를 안정시키면서도 비핵화를 이뤄야 하는 방향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같은 내용은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기 이전에 정부가 여러 차례 강조해 온 것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북한의 2차 핵실험 강행을 막고 북한을 6자회담에 끌어내려면 더욱 단호한 대응책을 제시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즉 북한이 사태를 악화시킬 경우 북한에 가해질 ‘채찍’과 6자회담에 응했을 때의 ‘당근’을 구체적으로 협의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중 양국 정상이 원론적인 수준에서 합의한 것은 미국과 일본의 대북 강경 대응 움직임을 완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우력하다.
○ 대북제재 완화 공조
한중 정상은 이날 회담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필요하고 적절한 대응조치를 취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유엔 안보리가 논의 중인 대북제재 결의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양 정상은 외교적 표현을 구사했지만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결의안이 한중 양국의 뜻에 맞게 완화된 방향으로 조율된 데 대해 찬성의 뜻을 내비친 것으로 분석된다. 유엔 안보리가 논의 중인 대북제재 결의안에서 군사제재 근거가 빠지는 등 크게 완화됐기 때문이다.
두 정상이 ‘안보리 결의안 동참 및 지지’ 의사를 밝힌 것은 미국과 일본에 안보리 결의안 범위 안에서 대북 제재를 추진해야 한다는 뜻을 표명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일본은 이미 북한 선박 입항 금지 등 독자적인 대북제재에 나섰고, 미국 역시 안보리 결의안과는 별개로 대량살상무기(WMD) 확산방지구상(PSI)을 통해 북한 선박에 대한 공해상 검문 등 ‘해상봉쇄’를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밝혔기 때문이다.
중국은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전면적인 해상봉쇄가 무력충돌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반대하고 있다. 정부도 중국처럼 PSI 전면 참여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
○ 대북특사 파견 검토
두 정상은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한 외교적 방안으로 대북특사 파견을 적극 검토하기로 했지만 이 카드가 효과를 거둘지 역시 의문이다. 현재로서는 “(대북특사 파견이) 가능성의 영역에 있지만 향후 사태 전개에 따라 언제든지 꺼내들 수 있는 외교적 카드”라는 게 정부 당국자의 설명이다.
현재 상황에서 대북특사 파견의 열쇠는 중국이 쥐고 있다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중국이 북한에 대해 지렛대 구실을 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한국 정부도 중국의 적극적인 역할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대북특사 카드가 실제 효과를 발휘할지는 두고 봐야 한다는 신중론도 만만찮다. 7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 이후 북-중 관계가 냉각돼 있는 데다 특사를 보낸다 하더라도 중국이 북한에 줄 ‘당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은 미국과의 양자회담을 대화 복귀의 전제조건으로 요구하고 있으나 이 사안은 중국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한중 두 나라가 앞으로 벌일 다양한 고위실무급 협상의 주요 논의 대상도 관심이다. 여기에서 정부가 추진해 온 ‘공동의 포괄적 접근방안’에 대해 중국과 의견을 모을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 고대사 문제는 기존 합의 유지
한중 정상은 이날 ‘동북공정’이라는 직접적인 표현 대신 ‘고대역사 문제’라는 문구로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를 협의했다. 이날 두 정상이 이 문제 해법의 준거 틀로 삼은 것은 2004년 8월 합의한 ‘구두양해 사항’이다. 당시 양국은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가 외교 갈등으로 비화되자 협상을 벌여 고구려사 문제를 정치문제화하지 않고 학술적 견지에서 해결해 나가자는 취지의 5개항 이행에 합의했다. 그러나 ‘구두양해 사항’에도 불구하고 중국학자들이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포함시킨 연구 논문을 지속적으로 발표해 왔다는 점에서 고대사 문제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는 셈이다.
베이징=정연욱 기자 jyw11@donga.com
■후진타오와 이심전심… 아베와는 동상이몽
4일 간격으로 이뤄진 한중 정상회담과 한일 정상회담은 여러 면에서 대조를 보였다.
13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북핵 문제를 논의하는 데 회담 시간 대부분을 할애했다. 두 정상이 북한 핵문제를 매우 중요하고 긴급한 사안으로 보면서 심도 있게 다뤘다는 의미다.
노 대통령은 회담 후 “양국 관계뿐 아니라 급박한 현안으로 돼 있는 북핵 문제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눈 매우 중요한 계기였다고 생각한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사전 실무협의가 없었음에도 대북 제재 결의안은 물론 북한의 핵실험 발표 이후 후속 대응 방향에 대한 합의가 나올 정도였다.
9일 북한 핵실험 이후 양국의 외교 라인이 활발하게 물밑 접촉을 가졌던 것도 이유지만 기본적으로 한중이 북핵 문제를 대화로 풀어간다는 시각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반면 9일 서울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은 “유엔과 관계 당사국 간의 조율된 대응이 필요하다”는 원론적인 수준의 합의에 그쳤다.
노 대통령이 한일 정상회담에서 핵실험을 감행한 북한을 규탄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자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제안을 거절했기 때문. 당시 노 대통령은 ‘사전 실무협의가 없었다’는 이유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핵실험에 대한 한일 간의 온도차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서도 한중 정상회담에서는 후 주석이 2004년 고구려사 문제를 정치문제화하지 않고 학술적 견지에서 해결하기로 합의한 5개항의 구두양해를 이행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한일 정상회담에서는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 문제에 대한 뚜렷한 합의가 없었다.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