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판국에 핵실험 12일 북한 평안북도 향산의 한 유치원에서 세계식량계획(WFP)이 지원한 음식을 먹고 있는 어린이들. WFP는 “유엔의 대북 제재로 북한에 식량 지원이 끊기면 주민 수백만 명이 올겨울 큰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향산=AP 연합뉴스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경제협력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경협을 중단하고 인도적 지원은 계속하는 게 이치에 맞는 것 아닌가요?”
한국 정부는 7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 이후 쌀, 비료 등 인도적 지원을 중단했으면서 북한의 핵실험 강행 이후에도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은 계속하려 하고 있다.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이를 원칙을 저버린 태도라고 비판하고 있다.
특히 ‘쌀 지원 중단-경협 계속’이라는 한국 정부의 선택은 한미 양국이 2003년 정상회담 때 천명한 남북 관계 원칙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한국 정부는 9일 북한의 핵실험 발표 이후 한때 대북 포용정책 궤도 수정을 시사했지만 이후 통일부는 내부적으로 “양대 경협사업의 중단은 없다”는 쪽으로 선회했다.
▽“한미 정상회담 합의문 위반”=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2003년 5월 백악관에서 첫 정상회담 후 공동성명을 통해 인도적 지원 및 경협에 대한 양국의 합의사항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대북 인도적 지원은 정치 상황과 연계하지 않되 배분의 투명성 강화를 위해 노력하며, 남북 경협은 북핵 전개 상황을 고려한다”고 명시했다.
이 합의는 지금도 한미 양국의 원칙으로 살아 있다. 실제로 미 행정부는 대북 제재는 엄격하게 적용하되 이와 별개로 “인도적 지원은 계속한다”는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단, 쌀 지원은 투명성 문제로 올해 들어 중단한 상태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 대사가 북한의 핵실험 직후 한국 정부에 경협 중단을 요구한 것도 그 같은 합의에 근거한 것이라고 소식통들은 전했다.
▽“명분과 실리 모두 잃었다”=한국 정부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 직후 “비료 10만 t과 쌀 50만 t 지원을 미사일 문제 해법이 마련될 때까지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지난달 정상회담에서 “쌀과 비료 제공을 거부한 것도 제재라면 제재”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가 인도적 지원 중단과 제재를 별다른 구분 없이 취급하고 있음을 내비친 것이다.
이 같은 한국 정부의 태도에 대해 북한 경제 전문가인 마커스 놀랜드 미국 국제경제연구소 연구원은 13일(현지 시간) 워싱턴 외신기자클럽 세미나에서 “굶주린 인민에게 갈 수 있는 쌀 제공은 중단하면서 김정일 정권에 현찰이 들어갈 개성공단 및 금강산관광 사업을 계속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주장했다.
세계식량계획(WFP)의 마이크 허긴스 대변인은 16일 미사일 발사 이후 한국이 식량 원조를 중단했으며 중국도 지원량을 지난해의 3분의 1로 줄였다고 말했다. 그는 “WFP의 올해 지원 규모가 평소에 비해 400만 명분 정도 줄었다”며 “식량이 지원되지 않으면 올겨울 북한은 매우 심각한 결핍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고든 플레이크 맨스필드재단 사무국장은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개성공단 사업을 중단함으로써 북한에 메시지를 분명히 줘야 한다. 하려면 단호하게 이른 시일 안에 해야 한다. 몇 달 뒤 어쩔 수 없이 국제사회에 이끌려 하는 식으로 중단하면 평양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마이클 맥더빗 해군분석연구센터(CNA) 전략문제연구소 소장 역시 13일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사업은 북한 인민의 삶과는 관계가 없으며, 북한 지도부에 현금을 공급하는 사업”이라고 꼬집었다.
한국의 대북 지원 과정을 잘 아는 워싱턴의 한 소식통은 16일 “한국이 대북 경협을 정치적으로 판단하는 바람에 북한 주민에게 도움이 될 인도적 지원이 볼모로 잡힌 측면이 크다”고 지적했다.
워싱턴=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