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의 공포를 떨쳐낸 염영숙 씨의 생기발랄한 자태.
유방을 잘라낸 아픔을 딛고 당당하게 가슴을 편 패션모델 아줌마들. ‘핑크 리본 파티’란 패션쇼 이름에 걸맞게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이들에겐 이제 암 환자의 우울함은 사라지고 자신감과 희망이 넘쳤다. 사진 제공 한국노바티스
17일 오후 5시경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 야외무대에서 40∼60대 여성의 패션쇼가 열렸다. 요즘은 아줌마 패션모델도 심심찮게 볼 수 있지만 이날 모델은 남달랐다. 한쪽 또는 양쪽 가슴을 잘라낸 모델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유방암을 앓았거나 앓고 있다. 여성성의 상징인 유방이 없더라도 여성의 매력을 가꾸고 자신감을 잃지 말자는 취지에서 이들은 기꺼이 모델로 나섰다.
한복을 비롯해 인도, 일본, 중국, 태국의 전통 의상을 토대로 디자인한 핑크색 옷을 입고 나타났다. 이 행사를 마련한 한국유방암환우연합회는 패션쇼에 ‘핑크 리본 파티’란 이름을 붙였다.
무대에 등장하기 전 서로 “너무 예쁘다”면서 수다를 떨던 아줌마 모델들은 신비감을 자아내는 음악과 함께 쇼가 시작되자 익살스러운 워킹(걷기)을 선보였다.
인도 전통 복장을 한 조영진(52) 씨는 워킹을 하다 배와 골반을 흔드는 ‘벨리댄스’를 선보였다. 관객들은 환호와 웃음으로 화답했다. ‘어우동 옷’을 입은 이정일(56) 씨는 엉덩이를 살짝 흔드는 교태를 부리며 걷다 윙크를 날렸다. 연합회 회장 김종현(65) 씨는 족두리에 한복을 입은 채 우아한 걸음으로 무대를 장식해 큰 박수를 받았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관객은 연합회 회원과 의사 등 50여 명에 불과했다. 연합회 창립을 축하하는 내부 행사였기 때문이다.
유방암 환자인 한 관객은 “유방 절제술을 받은 뒤 옷을 입어도 멋이 나지 않고, 남편이 무의식중에 (유방에) 손을 대려다 흠칫 물러서면 섭섭하고 허전했다”며 “이번 패션쇼를 통해 내 몸이 소중하고 가치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1시간여에 걸친 쇼가 끝난 뒤 수다 한마당이 펼쳐졌다. 모델과 환자, 의사가 한가족이 되어 병을 발견하게 된 사연과 극복기를 자연스럽게 나눴다.
“2000년 갱년기 클리닉을 다니다가 암을 발견했어요. 가족력도 없고 술 담배는 근처에도 안 갔어요. 애들도 모유로 길렀죠. 그런데 암이라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더군요.”
대부분이 “암 진단을 받으면 죽음을 먼저 떠올렸다”고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유방암은 초기에만 발견하면 98%가 생존할 수 있는 비교적 ‘착한 암’”이란 말도 잊지 않았다.
패션쇼 직전 ‘웃음 강의’를 한 김명자(44) 주부도 화제였다. 현재 한국웃음연구소 강사인 그녀는 2001년 양쪽 유방을 잘라낸 뒤 웃음강사로 나섰다.
“하루 내내 누워 지내며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이 떠먹여 주는 밥을 먹으며 생활했으니 웃을 일이 뭐가 있었겠어요. 나 하나 때문에 집안이 침울하니 하루하루가 끔찍했어요. 어느 날 천장을 바라보다가 이렇게 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냥 무작정 웃었어요. 그 후부터 웃음 연습을 했지요. 효과가 있었어요. 우리 집엔 ‘웃음 구역’이 있어 그곳을 지날 땐 누구든 크게 웃어야 합니다.”
‘무조건 따라 웃으라’는 김 씨의 주문에 수줍어하던 사람들이 강연이 끝날 즈음엔 너나없이 활짝 웃었다.
제약회사 한국노바티스의 후원으로 열린 이날 행사에서 유방암 환자들은 여자 고등학교의 교육 과정에 유방암 자가진단법을 넣는 일을 연합회의 첫 과제로 삼았다.
하임숙 기자 arteme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