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품도 되고, 카메라도 되는 카메라지(왼쪽). 금속공예가 심현석 씨는 전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뤄지는 카메라지의 제작은 은과 교감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원대연 기자
《바야흐로 이미지 시대다.
카메라로 자신의 일상을 찍어 개인 홈페이지나 블로그에 올린다.
펜으로 일기장에 일상을 기록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아날로그형 인간’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디지털카메라(디카)는 젊은 세대의 생활필수품이 된 지 오래다.
한 인터넷 설문 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10대 중 70%가 디카나 디카 기능이 장착된 휴대전화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카메라 사용 형태가 다양해지면서 로모와 필름 카메라 등 ‘한물간’ 아날로그형 카메라를 이용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이미지 시대=카메라 전성시대’라는 등식이 어색하지 않다.
카메라가 각광받는 요즘 기존 카메라와 완전히 구별되는 특이한 카메라가 있어 화제다.
바로 ‘카메라지(CamerAg)’다.》
○은으로 만든 카메라
카메라지는 카메라(Camera)와 은의 화학기호(Ag)가 합쳐져 생겨난 용어다. 이름에 걸맞게 카메라지는 본체에서부터 버튼까지 렌즈와 스프링을 제외한 모든 부품이 은으로 만들어졌다.
카메라지가 은으로 제작된 이유는 단순하다. 제작자인 금속공예가 심현석(34) 씨가 가장 좋아하는 소재가 은이기 때문이다.
심 씨는 필름 인화지 현상액 등 사진 현상의 주요 재료에 빛을 안착시키는 효과가 있는 은염 성분이 들어간다는 점에 착안해 은으로 카메라를 만들어 보자는 발상을 했다고 한다. 만드는 데 걸리는 기간은 개당 평균 2, 3개월. 설계도를 그리는 작업부터 마무리 공정까지 모든 것이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카메라지 1호가 탄생한 것은 1999년 여름, 세상에 정식으로 첫선을 보인 건 2001년 캐나다에서 열린 전시회 때였다. 지금까지 태어난 카메라지는 21개로 11차례(해외 9회, 국내 2회)의 전시회를 통해 세상과 만났다.
경기 과천시 국립현대미술관에도 2점이 전시돼 있다. 개인이 6개를 구입했고 나머지 13개는 아직 작가의 품 안에 있다. 은이라는 고급 소재를 썼고 직접 손으로 만들었다는 가치 때문에 가격은 500만∼1000만 원 선이다.
○ 카메라지의 정체성
‘장식품이야, 카메라야?’
카메라지를 처음 본 사람이라면 어김없이 이런 질문을 던진다. 정답은 ‘둘 다’다.
어떤 의도로 구입했느냐에 따라 장식품이 되기도 하고 카메라로 쓰이기도 한다.
탤런트 지진희 씨는 카메라지를 집안 인테리어 소품으로 활용하고 있다. 지 씨에게 카메라지는 장식품인 셈.
그러나 3년 전 일본 도쿄의 ‘갤러리 코모’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카메라지에 매료돼 구입한 일본인 건축가에게는 카메라지야말로 손색없는 카메라다. 그는 카메라지를 자신이 설계한 집들을 기록하는 도구로 쓰고 있다.
자동 초점과 줌 기능처럼 디카와 전문가용 카메라에서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하고 편리한 기능은 없지만 카메라지도 엄연한 카메라다. 일반 필름 카메라에 쓰이는 35mm 필름을 넣고 사진을 찍으면 된다.
카메라지로 찍은 사진들은 로모로 찍은 것처럼 다소 거칠고 흐릿하지만 따뜻한 느낌을 준다. 도쿄의 갤러리 코모에서 16일부터 열리고 있는 카메라지 전시회에는 일본의 카메라 브랜드인 펜탁스의 최고경영자(CEO)가 다녀갔을 만큼 카메라 업계의 관심도 크다.
○ 카메라는 기억을 담는 상자
심 씨는 귀걸이 반지 보석상자 등 장신구를 주로 만드는 금속공예가다.
‘왜 하필 카메라를 만들었느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단다. 유학 시절 장신구 외에 평생 만들 아이템을 찾다가 어렸을 때 자신의 모습을 찍어주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는 것.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카메라는 기억을 담는 특별한 상자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중학교 1학년 때 고장을 낸 어머니의 구형 카메라에 대한 기억도 밀려왔고요.”
카메라에 담긴 기억은 평생 지속될 것이라는 생각도 한몫했다.
여름방학 내내 작업실에 틀어박힌 채 은과 씨름한 결과 첫 카메라지를 완성했다. 처음에는 전시회 때 메인 요리(장신구)의 양념(카메라지) 정도로 활용할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카메라지가 메인 작품 자리를 차지했다.
“공예가로 활동하는 한 계속 카메라지를 만들 생각입니다. 기억을 담는 예술상자의 매력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