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높이뛰기 선수는 한순간에 수평에너지를 수직에너지로 바꾸며 두둥실 허공에 떠오른다. 바위꾼은 한 땀 한 땀씩 암벽을 주름잡으며, 수평의 세계에서 수직의 ‘하늘정원’으로 향한다. 장대높이뛰기 선수는 허공에 떠오르는 순간 장대를 버리지만, 바위꾼은 암벽 꼭대기에 오르는 순간 또 하나의 바위가 된다. 가부좌를 틀고 부처가 된다. 가을암벽은 마른 근육질처럼 피부가 꺼끌꺼끌하다. 그 몸을 만지는 바위꾼들의 손바닥은 아릿하고 달다. 북한산 인수봉 비둘기 길을 오르는 선등자 박길봉(위) 씨와 그 뒤를 따르는 허화자 씨. 석동률 기자
‘자벌레는 한 발자국이 몸의 길이다/한 발자국을 떼기 위해 온몸을/접었다 폈다 한다/자벌레라 불리지만 거리를 재지도/셈을 하지도 않는다/…/한 발자국이 몸의 길이인 자벌레는/모자라는 것도 남는 것도/모두 다른 몸의 것이라 생각하며/몸이 삶의 잣대인 자벌레는/생각도 몸으로 하기 때문이다.’ (구광렬 ‘자벌레’)
태초에 길은 없었다. 누군가 맨 처음 앞서 가면, 그 발자취가 바로 길이 됐을 뿐이다. 바위에도 길이 있다. 바윗길이다. 수많은 사람이 그 길을 따라 바위 등짝에 오른다. 한 땀 한 땀 자벌레처럼 ‘몸을 접었다 폈다’ 하며 바위를 탄다. 한번 오르면 결코 뒤돌아보지 않는다. 밑은 까마득한 천 길 낭떠러지. 바위꾼들의 몸은 그대로 ‘인간잣대’다. 몸으로 생각하고, 육신으로 한 고비를 넘는다. 그렇게 또 한 세상을 오른다.
북한산 인수봉(810.5m)엔 바윗길이 60여 개 있다. 도봉산 선인봉(708m)엔 40여 개의 루트가 있다. 미국 요세미티 계곡의 거대한 화강암 절벽 엘캐피탄(2695m)엔 1000개가 넘는 길이 있다. 엘캐피탄은 수직 바위만 1086m. 거기에도 어김없이 실낱같은 길이 숨어 있다. 모든 길은 옳다. 그 길을 오르는 사람도 모두 옳다.
주부 클라이머 허화자(54) 씨는 이틀에 한 번꼴로 바위를 탄다. 전국 곳곳의 바위란 바위는 안 가본 곳이 없다. 경력 13년. 집에서도 쉬지 않고 힘을 기른다. 아령 철봉 등은 기본이고 팔굽혀펴기 50개 정도는 금세 할 수 있다. 체력 나이로는 30대 초반. 이제 막내가 스물다섯이니 아이들(1남 2녀)도 다 키웠다. 남편은 2층만 올라가도 벌벌 떨 정도로 높은 곳은 딱 질색. 하지만 부인 허 씨의 열렬한 후원자다. 허 씨가 며칠 집에서 ‘방콕’이라도 할라치면 “어디 아파? 바위 타러 안가?”라며 슬며시 등을 떠민다. 허 씨는 “며칠만 산에 가지 못하면 우울증이 생길 것 같아요.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다 바위를 타게 되면 정말 황홀하고 행복합니다. 남편도 나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클라이머 경력 3년의 주부 서묘남(43) 씨는 일주일에 1번 정도 바윗길을 찾는다. 등산학교에서 처음으로 인수봉에 올랐을 때 ‘너무 힘들고 무서워’ 다시는 암벽에 오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새록새록 바위가 그리워 미칠 것만 같았다. 서 씨는 “바위엔 마약가루가 묻어 있나 봐요. 일단 한번 마시게 되면 중독이 돼서 도저히 끊을 수 없어요”라며 웃는다. 서 씨도 평소엔 조깅이나 철봉으로 지구력과 팔 힘을 기른다. 가끔 실내 암장을 찾기도 한다. 불만이라면 아이들(1남 2녀)이 중고교생이라 지방에 있는 암벽을 자주 갈 수 없다는 것. 주로 서울 근교의 인수봉이나 선인봉 등을 찾는 이유다.
송종선(47) 씨는 20년 경력의 베테랑. 그는 바위꾼 모임인 적벽산악회(cafe.daum.net/kaj5) 대장이다. 등록 회원만도 3000여 명. 거의 매일 회원들과 바위에 오른다. 평일엔 6, 7명, 휴일엔 10여 명의 회원과 함께 한다. 그는 늘 앞장서 바윗길을 열어 회원들을 이끈다. 몸동작이 가볍고 발끝이 거미처럼 쩍쩍 바위에 달라붙는다. 마치 발레하는 것처럼 경쾌하다. 바위는 손이 아니라 발로 오르는 것. 그는 “매일 오르고 또 올라도 재밌고 즐겁습니다. 바위는 하루에도 수십 번 변합니다. 같은 바위라도 언제나 새롭지요”라고 말한다.
성지 인수봉… “줄을 서시오”
逑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