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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의 별]송호근 서울대 교수의 조용필 찬가

입력 | 2006-10-28 03:00:00

가을이 깊어가는 서울대 캠퍼스에서 만난 송호근 서울대 교수. 김동주 기자


《이제는 퇴장할 준비를 하고 있는 해방세대와 전쟁세대의 쇠잔한 기억 속에서도 등불처럼 깜빡거리는 것이 있다. 노년에 접어든 그들이 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은 외롭다는 표시다. 그 시대의 고난을 느긋하게 관조하는 표정의 배경에는 대체로 남인수 노래가 깔린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만은”으로 시작된 흥얼거림은 반드시 ‘번지 없는 주막’으로 나아간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궂은비 내리는 이 밤도 애절쿠려”에 가락이 닿는 순간 식솔을 데리고 여기까지 건너온 자신이 대견하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다. 그러다가 무리 중의 누군가 “울려고 내가 왔던가”로 심사를 어지럽힌다. 대중가요는 동시상영관의 간판처럼 천박하지만, 한 세대의 감성대에 피어 있는 꽃무리임에 틀림없다.》

남인수가 가고 무작정 상경한 산업화 세대, 그 어수선한 시대의 정서를 트로트도 록도 아닌 특유의 리듬으로 담아낸 가수, 조용필! 그 왜소한 체구의 가수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렀을 때 나는 그가 짧지 않은 나의 인생과 동행할 것임을 예감하지 못했다.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 왔네/그곳은 춥고도 험한 곳…뜨거운 눈물을 먹는다”(꿈). 남진도 나훈아도 아닌, 발라드풍을 살짝 가미한 이 노래가 세간에 나왔을 때 나는 그에게 사랑서약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시의 뒷골목을 헤매던 더벅머리 청년의 꿈을, 꿈의 파편을 이런 가락으로 위로해 준 가수가 어디 있었던가 말이다.

사실, 내가 그를 진정 조우한 것은 1980년 초여름이었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이 뿜어대던 항도(港都)의 정서를 그냥 흘려듣던 후의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멀리 남녘 도시 광주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때, 그 누구도 그 누구를 위로하지 못했을 때, 가녀린 바이올린 선율로 시작되는 그 노래가 역사의 비수에 찔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줄 상상하지 못했다. 왜 하필 ‘창밖의 여자’였을까.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라는 부정의 절규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차라리 나를 잠들게 하라’는 고단한 주문 때문이었을까. 클래식풍에 더 가까웠던 그것은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최윤)의 끔찍한 세계를 고음의 옥타브로 무마한 추상화였다.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우리는 광주사태를 기억 속에 갈무리했다.

그 노래 이후 나는 조용필이 만들어 낸 다면적 음악세계에 푹 빠져 들었다. 그는 바람의 가수다. 바람의 철학도다. 그가 ‘이른 아침의 그 찻집’을 부르면 우리는 ‘바람 속으로 걸어간다’. ‘뜨거운 이름 가슴에 두는’ 사람이라면 그가 일으키는 바람을 맞지 않을 수 없다. 바람은 꿈이자 애인의 속삭임, 그의 바람은 좌절과 삶의 고통에서 몸을 일으킨다. 조용필은 끊임없이 바람 속을 헤매고 새로운 바람을 충동질했다. ‘바람이 전하는 말’을 듣는 ‘내 이름은 구름’이고, ‘바람이 잠드는 내 가슴에’ 외로워 기대는 그는 ‘바람 속의 여자’다. 그의 노래의 배경에는 언제나 바람이 불었다. ‘친구의 아침’에도 ‘이별의 뒤안길’에도 바람이 속살거린다.

대중가요이기엔 너무 추상적인 그의 노래가 대중의 가슴에 절절한 울림을 일으키는 것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는 뭇사람의 고해성사를 들어주는 성직자 같은 가수다. 그가 한때 흠모했다는 스페인 가수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는 세상 풍경을 경쾌하고 애절하게 바꾼다. 우리의 조용필은 마음이 따뜻한 신부(神父)처럼 비련의 주인공들에게 슬픔을 대면하라고 이른다. “그대 슬픈 베아트리체…사랑이란 욕망의 섬, 그 기슭에 다가갈 수 있다면”(베아트리체), “기도하는 사랑의 손길로 떨리는 그대를”(비련) 안을 수 있을 거라고, 복음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카리스마 없는 평범한 얼굴과는 달리 그의 인생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의 여자들은 다 떠났다. 바람인 듯 다 떠났다. ‘한 굽이 돌아, 흐르는 세월’을 토해 내다가, 느닷없이 ‘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 서리’로 애간장을 태우는 ‘간양록’으로 휘돌아간다. 누가 ‘갈 길 잃어 서성이는’ 바람에서 여인의 애환을 한 땀씩 엮어가는 피눈물을 찍어내라 했는가.

그렇게 몇 굽이를 돌았던가? 이제 환갑을 바라보는 언덕에서 조용필은 도시의 비장미를 담아낸 오페레타로 넘어가고 싶어 한다. 그의 깊은 울림과 넓은 가락의 진폭을 담아내기에 대중가요라는 장르는 너무 협소하고 호흡이 짧기 때문이다. 크로스오버로 첫발을 내딛는 그를 우리는 말리지 못한다. 빗속에서 ‘준에게’를 흐느껴 부르던 그의 심정을 전달받는 순간 우리는 그가 경계를 넘어야 하는 필연적 이유를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는 벌써 저만치 떠나 있다, ‘태양의 눈’으로. ‘어둠 속을 다시 비추며 다가오는 그대여’라고 소리치며 바람, 구름, 이별이 뒤범벅돼 진한 불꽃으로 타오를 그 태양의 도시로 건너가고 싶은 것이다. 그가 대중가요의 영역을 벗어난다고 해서, ‘돌아와요 부산항’에서 ‘태양의 눈’으로 진화하며 들려준 그의 노래가 부질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진작부터 도달하고 싶었던 긴 호흡의 세계인 오페레타에도 안주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 자신도 왜 그런지 까닭을 모를 것이다. 20세기 후반을 살아온 대한민국의 남녀노소가 제각각 마음의 길동무로 삼아온 조용필, 정작 본인은 사람들이 왜 자신의 노래를 서러움 없이 듣지 못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 “짝사랑은 짝사랑으로…”

묵직한 주제의 학술대회가 끝난 어느 봄날이었다.

발표자와 토론자들이 어울려 식사를 마친 뒤 조촐한 노래방에서 회포를 푸는 시간. 노래방행 선두에 섰던 송호근 서울대 교수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가사가 나오는 모니터를 등진 채 눈을 감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조용필의 노래였다.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다 송 교수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을 때 모르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주변에 누구의 노래냐고 물었다. “물어볼 것도 없이 조용필 노래”라는 말을 들었다. 그에게 세 번째 마이크가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기자가 모르는 조용필의 노래였다.

그날 송 교수는 10여 곡의 노래를 불렀는데 한결같이 조용필의 노래였다. 그중 절반은 처음 들어본 노래였다. 자세도 한결같았다. 눈을 감은 채 가사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부르는….

그랬다. 그는 조용필이 발표한 수백 곡의 노래를 정말 줄줄 꿰고 있었다. 콘서트장도 여러 차례 찾았다고 한다. 몇 년 전 가을 거센 빗줄기 속에서 펼쳐졌던 잠실운동장 콘서트에서는 5만 관중 속에서 실제로 ‘허공’에서 내려와 노래를 부르는 조용필의 열창을 끝까지 지켜봤다고 했다.

그에게 조용필은 ‘1980년 광주’와 함께 찾아왔다고 한다. 광주의 비극을 전해들은 사회과학도는 마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창밖의 여자’를 듣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렇게 체득된 그 한(恨)의 정서는 그의 영혼에 뜨겁게 각인돼 평생의 반려가 된 것이다.

그런 송 교수에게 시리즈 첫 원고를 청탁한 날 기자는 밤늦게까지 그와 여러 차례 통화를 해야 했다. 송 교수가 “음, 조용필이란 말이지, 조용필…”을 반복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와 조용필의 대면을 주선하려 했다. 뜻밖에도 송 교수는 극구 사양했다. “짝사랑은 짝사랑으로 남을 때 더 아름다운 법”이라며. 그러면서도 “신문을 읽고 저쪽에서 만날 생각이 있다면 또 모를까”라며 한 자락 여운을 남겼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