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도 팔자인가. 북핵이다, ‘일심회’다, 굵직굵직한 뉴스거리로 나라의 안보며 정체성 우려로 걱정이 잠잠해질 날이 없다. 그러나 그런 큰 걱정들은 큰일 한다는 사람들이 맡아 해 줄 것이니 글 써서 입에 풀칠이나 하는 서생들이 나서 봤자 별 뾰족한 수가 없다. 그러나 모두들 걱정을 하고 있는데 혼자만 걱정 않고 있기도 겸연쩍다. 그래서 작은 걱정이나마 보태 볼까 한다.
미국이 한사코 싫다는 사람들이 매달려 보는 중국은 중국대로 우리들 걱정을 덜어주는 것 같지 않다. 고구려사가 중국사의 일부라고 어지럽게 하더니 베이징 올림픽 성화를 백두산에서 채화한다며 또 놀라게 한다. 이대로 그냥 있으면 앞으론 ‘춘향전’도 중국 것이라고 우기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이 글을 쓴다. 왜냐하면 그런 억지가 통할 수 있는 물증(?)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 얘기의 발단은 자랑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1930년대에 한국의 춘향전이 당시 세계 최고의 발레단에 의해서 유럽서 공연됐다는 기록을 발레 문헌에서 발굴했다. 1960년대 중반, 지금부터 40년 전의 일이다.
나는 이 사실을 1970년대 초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신문 잡지에 소개하고 누군가가 그를 추적해 주기를 바랐다. 그도 그럴 것이 춘향전을 무대에 올린 발레단이 여느 범상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지만 20세기 발레는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예프 등 음악가를 길러 내며 그들의 발레 음악을 전설적인 니진스키 남매, 세르게이 리화 등의 무용수를 시켜 무대에 올린 댜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에 의해 막이 올랐고 그들에 의해서 발레 역사가 쓰였다.
그 발레단에서 공연한 20세기 발레의 고전,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와 ‘불새’, 쇼팽의 ‘공기의정’과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 등을 안무한 거장이 미하일 포킨이다. 발레 ‘춘향전’은 바로 이 포킨의 안무에 의해 모차르트의 음악을 반주로 프랑스의 야수파 화가 앙드레 드랭이 꾸민 무대 및 의상으로 러시아 발레단이 볼셰비키 혁명 이후 둥지를 틀고 있던 몬테카를로에서 1936년 초연된 것이다.
그로부터 40년 나는 포킨의 ‘춘향전’을 백방으로 추적해 보려 했으나 힘이 달렸다. 그러다 2년 전 베를린에 들를 기회가 있어 옛날에 그곳서 사귀던 사람들을 찾았으나 이미 대부분이 타계한 가운데 나의 베를린 시절에 ‘디벨트’지의 음악, 무용 평을 쓰던 클라우스 가이텔을 재회할 수 있었다. 그는 얼마 전에 만 80세가 되면서 은퇴했다면서도 오전 시간에 나와 샴페인 한 병을 거뜬히 비울 정도로 아직 건장했다.
나의 춘향전 추적의 고심담을 듣더니 1930년대까지만 해도 춤사위를 기록해 두는 무보(舞譜)가 보급되지 않아서 포킨의 안무를 찾으려면 공연을 기록한 필름을 구해 보는 수밖에 없다고 일러 주었다. 그러나 발레 ‘춘향전’의 필름을? 그런 것이 도대체 있기나 하는지, 있다 해도 구할 수가 있는 것인지…그러자 가이텔은 나를 앉혀 둔 채 거의 30∼40분 동안 전화통에 매달린 채 국내외의 요긴한 연락처에 문의 조회해 주었다. 그의 도움으로 나는 그 뒤 발레 ‘춘향전’은 1936년 몬테카를로만이 아니라 미국과 유럽의 몇몇 도시에서 2차대전 후에도 공연됐고, 그뿐만 아니라 적어도 두 군데에 포킨 안무의 발레 공연 필름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국내의 한 재단에 이 사실을 전하자 발레 ‘춘향전’의 내 추적을 지원해 주겠다는 호의적인 반응까지 얻었다. 그러나 하나의 걸림돌이 있었다. 1930년대의 프랑스 화가 드랭이 한국의 의상이며 한국의 풍경을 알 리가 없다. 1936년의 몬테카를로 이후 미국 유럽의 여러 무대에서는 중국 의상의 춘향과 이 도령이 중국적 풍경 속에서 춤을 추는 ‘춘향전’의 중국화가 이뤄진 것이다. 후원재단은 날개를 접어 버렸다. 이러다 보면 중국의 ‘동북공정’ 다음 대상에 ‘춘향전’이 오르지 않을까 걱정된다.
안 된다. 포킨의 발레 ‘춘향전’을 찾아와야 한다. 그래서 한복의 춘향과 이 도령이 한국의 무대장치에서 춤추는 발레로 리메이크해서 세계로 내보내야 된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사 객원 大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