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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연구가-타짜-호스트…영화를 완성시킨 얼굴없는 프로들

입력 | 2006-11-02 02:57:00


“조명을 비추면 이 베이지색 테이블보가 예뻐요.” “그릇은 뭘로 할까요? 음식의 색감이 잘 살려면…” “꽃 장식은 ‘스마일락스’ 어때요.”

지난달 28일, 서울 종로구 신교동의 식문화교육기관 ‘푸드 앤 컬처’에서 영화 ‘식객’의 촬영을 위한 회의가 한창이다. 음식 조리 후 세팅까지 연습하는 중. 다음 날 오전 5시, 김수진 원장은 노량진 수산시장으로 출동해 최상급의 싱싱한 도미를 사 왔다. 이 도미의 살로 전을 부친 다음 국수를 넣어 끓이는 궁중음식 도미면을 만들어야 한다.

김 원장은 영화 ‘식객’의 음식감독이다. 허영만의 요리 만화 ‘식객’을 스크린에 옮기는 이 영화에는 100여 가지 음식이 나와 음식감독이라는 직함이 생겼다. 재료비만 5000만원 정도. 그 다음 날, 용인체육관에서는 5가지 생선을 재료로 하는 요리 대회 촬영이 있었다. 김 원장은 촬영 내내 주연 배우 김강우와 임원희 옆에서 요리법을 지도했다.

“처음에 칼질도 못하던 배우들이 이젠 무채를 ‘예술’로 썰죠. 촬영 전 4주 만에 1년 동안 배울 요리를 다 배웠으니.” 이날 오후, 다음 날 촬영에 쓸 황복이 남해에서 도착했다. 제철이 지나 자연산이 없어 일부러 배를 띄워 구해 온 것. 30마리에 300만원이다. ‘왕의 남자’의 궁중 연회상도 만들었던 김 원장이 이끄는 팀 12명, 특급 호텔 조리사 6명이 ‘식객’ 촬영에 동원된다.

관객은 똑똑하다. 영화 장면에 조금이라도 리얼리티가 떨어지면 가차 없는 비판이 가해진다. 그래서 최근 촬영 현장에는 영화 소재를 잘 아는 민간인 전문가가 꼭 등장한다.

관객 622만 명을 넘은 영화 ‘타짜’에는 과거 타짜였던 장병윤 씨가 기술자문으로 참여했다. 도박감독인 셈. 그는 배우들에게 촬영 전 화투패 섞는 것부터 밑장빼기(윗장을 빼는 척하면서 밑장을 빼는 기술) 등 고난도 기술까지 가르쳤다. 조승우는 다른 건 다 잘했지만 밑장빼기가 안 돼 그 부분은 최동훈 감독이 손 대역을 했다. 그는 “영화에 참여한 이유는 타짜의 세계를 보여 줌으로써 일반인이 돈 딸 확률은 0.1%도 안 된다는 걸 깨닫도록 하기 위해”라고 강조했다.

촬영 현장에 나오지는 않지만 직간접으로 도움을 주는 ‘얼굴없는 전문가’도 있다.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에서 여주인공 김지수는 동대문 짝퉁 디자이너. 빚에 허덕이는 그가 명품 카피 옷에 라벨까지 붙여 팔다가 상표법 위반으로 걸리는 내용이 나온다. 변승욱 감독은 동대문 의류업체 사람들을 상대로 취재를 했지만 다들 잘 얘기해 주지 않았다. 그러다 만난 한 매장 주인이 “1년에 몇 번씩 이탈리아 등지에 명품으로 빼입고 나가 매장에서 몰래 신상품 사진을 찍거나 사서 자세히 본 뒤 바로 환불한다”는 등의 동대문 돌아가는 얘기를 해 줬고 이는 영화에 김지수가 홍콩에 가는 것으로 반영됐다.

‘사랑 따윈 필요없어’에서 호스트로 나오는 김주혁은 실제 호스트를 만났다. 호스트가 조언한 ‘여성을 사로잡는 방법’은? 얼굴도 옷차림도 아닌 ‘매너’였다.

‘잔혹한 출근’에서 김수로는 사채 때문에 유괴를 저지른다. “돈에는 정이 없다네” 하는 영화 속 사채업자의 모습은 김태윤 감독이 실제 만난 사람. 김 감독은 “학생 때 너무 힘들어 사채를 썼는데 ‘학생, 열심히 살아야 돼’ 하며 점잖게 말하더니 원금만큼 이자를 받더라”며 “좋은 말하며 뒤통수치는 영화 속 캐릭터에 반영됐다”고 말했다.

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