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하순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의 한 잡화점에서 돈을 내지 않고 화장품 등 1200엔(약 9600원)어치를 주머니에 넣고 나오던 한 신사(59)가 경비원에게 붙잡혔다. 경찰 조사 결과 이 신사는 근처 중학교 교장으로 밝혀졌다.
이에 앞서 5월에는 도야마(富山) 현과 도쿄(東京)에서 각각 공영방송인 NHK도야마의 방송국장(54)과 경시청 공안2과장(55)이 비슷한 혐의로 적발됐다. 두 사람이 훔친 물건의 총액은 한국 돈으로 환산해서 각각 4만 원과 3200원이었다.
쇼핑을 하면서 물건을 슬쩍하는 일명 ‘만비키(萬引)’는 일본에서 자제력이 약한 청소년들이 충동적으로 저지르는 전형적인 10대 범죄로 통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50대 이상의 고령자들 사이에서 만비키 범죄가 유행처럼 번져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한 예로 후쿠시마(福島) 현에서는 1∼8월 검거된 만비키범 중 60세 이상이 36%를 차지했다. 고령자들의 가세로 만비키 범죄 전체 건수도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
10대 청소년들은 화장품 의류 책 문구 등을 주로 슬쩍하지만 고령자들은 식료품을 훔치는 사례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이 특징이다. “오늘 당장 먹을 게 없어서 나도 모르게 그만 손이 가고 말았다”는 고령자들도 있다. 21세기 세계 2위의 경제대국에서 배가 고파서 빵을 훔치는 ‘장발장’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
그러나 교육자 언론인 경찰 등 궁핍과는 거리가 먼 사회 지도층까지 만비키 범죄에 빠져들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으로는 스트레스가 꼽힌다.
만비키 범죄를 청소년기의 통과의례라는 관점에서 보는 심리학자도 있다. 즉 물자가 부족하고 규율이 엄한 시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일본의 고령 세대가 뒤늦게 10대의 심리상태로 되돌아가 충동에 몸을 맡긴다는 해석이다.
도쿄=천광암 특파원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