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전통 색감인 오방색의 한복을 입고 대문을 살며시 여는 여인을 그린 작품 ‘오색문’의 김덕용 씨. 강병기 기자
어머니 - 청실홍실
《화가 김덕용(45) 씨의 작품에서는 세월을 삭히고 삭힌 듯한 정겨운 향기가 난다.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낯익은 얼굴과 풍경들이 두둥실 떠오른다.
그의 작업은 독특하다.
옛 가구 조각을 콜라주하듯 손으로 붙여 입체감을 주는 평면을 구성한 뒤 옻칠이나 금박, 단청 기법으로 이미지를 넣는다.
자개나 모시를 붙이거나 낡은 대문의 손잡이를 ‘설치’한 작품도 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한국 고전미 찾기’ ‘한국미의 자리 이동’이라고 말한다. 오래된 일상에서 한국미의 유전자(DNA)를 발굴해 현대로 이동시키는 작업이라는 설명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젓갈처럼 오래 묵은 세월과 자연스러움이 잉크처럼 번져 있다.
서울 종로구 송현동 이화익갤러리(02-730-7817)에서 8∼20일 마련하는 전시 ‘집 들러보다’는 2년 만의 개인전. 20여 년간 천착해 온 고유의 작업 방식에는 큰 변화를 주지 않았지만, 이번 전시에는 작품들끼리 서로 조응하면서 이뤄내는 공간감을 내세웠다.
전시장은 옛 시골의 동네 길에서 집 마당으로 들어가는 ‘짧은 여정’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머금고 있다. 동네 길을 묘사한 ‘꽃길’, 강아지가 졸고 있는 ‘가을 햇살’, 대문에서 미소를 띠며 반기는 여인을 담은 ‘오색문’, 마당의 ‘정안수’, 사랑방 책을 그린 ‘서랍 속의 추억’, 안방 어머니의 모습을 그린 ‘청실홍실’ 등. 디스플레이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관객들이 옛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누이의 단아함을 그린 ‘누이의 뜰’이나 창문턱에 기대어 졸고 있는 소년과 참새를 함께 담은 ‘길몽’도 그 이야기의 맛을 더해 준다. 특히 전시에서 두 점 선보이는 여인의 누드 작품은 성적 매력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실루엣을 보는 것처럼 은근한 관능미를 풍긴다. 벗은 몸을 그린 작품인데도 한복을 입은 여인의 고전미를 보여 주는 것 같다.
작가는 “내 그림은 단순히 옛 추억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한국미의 원형을 탐색하는 작업”이라며 “옛 가구처럼 첩첩이 쌓인 시간 속에 내재된 한국미를 계속 찾아낼 것”이라고 말했다.
전영백 홍익대 미대 교수는 “김덕용의 한국성은 시간의 축적과 삭힘의 미학이 담긴 나무판을 통해 나온다”며 “나뭇결의 자연스러운 선율은 작품을 이루는 핵심 요소”라고 말했다.
그의 작품은 2004년부터 한국 젊은 작가의 작품을 대상으로 한 크리스티경매에 계속 오르고 있다. 그가 추구해 온 한국 고전미의 ‘발굴 방식’이 외국인들의 시선을 잡았다는 뜻이다.
서울대 미대와 대학원을 나온 작가는 고교 미술 교사로 13년간 지낸 뒤 3년 전에 전업 작가로 나섰다. 작가의 잠재력을 아까워한 주위의 권유와 “내 길을 더 찾아가고 싶다”는 작가의 바람이 맞아떨어졌다. 주부였던 아내 최혜정 씨도 “이젠 내가 돈을 벌겠다”며 남편의 ‘그림 외길’을 닦아 줬다.
“30대에 나섰다면 ‘튀고 싶다’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을 겁니다. 내 작업을 20여 년 해왔는데도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이 떠오릅니다. 그림은 벗기면 벗길수록 새롭기도 하면서 같은 면을 지닌 양파 같습니다.”
허 엽 기자 h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