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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천광암]“집단괴롭힘 못견뎌” 日자살예고 편지 충격

입력 | 2006-11-08 03:00:00


한 학생의 편지가 7일 일본 전국의 학교와 우체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일본 문부과학성 제니야 마사미(錢谷眞美) 초중등교육국장은 한밤중인 이날 0시 15분 긴급회견을 자청했다.

그는 문부과학상 앞으로 배달된 익명의 편지를 황급히 공개했다. “학교에서 집단 괴롭힘(이지메)을 당하고 있으며 8일까지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 11일 자살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봉투 안에는 반 친구들과 교장에게 보내는 편지도 들어 있었다. “왜 나를 괴롭히는가”, “왜 이지메를 호소해도 아무 것도 해 주지 않는가”라는 항변이 각각 담긴 편지였다.

문부성은 회견에서 “이지메 문제를 해결할 테니 반드시 살아 있어 달라”고 호소한 뒤 날이 밝자마자 행정력을 총동원해 발신인 찾기에 나섰다.

유일한 단서는 소인에 사용된 ‘풍(豊)’자.

문부성은 ‘풍’자를 사용하는 전국 44개 우체국에 협조를 요청하는 한편 해당 교육위원회에 비슷한 상담 사례가 있었는지를 샅샅이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일선 학교에서도 담임이 편지 사본을 놓고 반 학생들의 필적과 하나하나 대조하거나, 교장이 전교생을 모아 놓고 “자살은 절대 하지 마라”고 당부하는 등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편지 내용이 사실인지 확인되지 않은 단계에서 일본 정부가 이처럼 공개적으로 떠들썩한 반응을 보인 이유는 최근 일본에서 이지메로 인한 자살과 자살미수사건이 보름이 멀다 하고 꼬리를 물고 있기 때문이다.

원인을 놓고 여러 가지 분석이 나오지만 일선 학교가 이지메 사실을 쉬쉬하는 바람에 문제가 손을 쓰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해졌다는 게 정설이다.

교육 당국이 지난 7년간 ‘이지메 자살 0건’이라는 엉터리 통계에 기대 손을 놓고 있는 동안 일본 중고교생의 반 이상이 ‘이지메 하는 쪽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라는 위험한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는 것.

3일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한 학생이 자신을 괴롭혔다는 이유로 다른 학생을 과도로 찌르는 사건이 발생한 것을 보면 일본의 이지메 파문을 남의 일로만 보아 넘길 일은 아닌 듯하다.

사건을 숨기고 파문을 덮기에 급급한 한국의 교육 당국과 학교 측은 일본의 잘못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자성해 볼 일이다.

천광암 도쿄 특파원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