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들의 이름 순서 때문에 두 가지 버전으로 제작된 뮤지컬 ‘아이 러브 유’의 포스터의 일부. 사진 제공 클립서비스
대학로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아이 러브 유’의 포스터와 전단은 두 가지 버전이다. 얼핏 보면 똑같은 듯한데, 자세히 보면 딱 한 부분이 다르다. 하나는 배우 이름의 순서가 ‘선우, 이건명…’으로 돼 있고, 또 다른 포스터는 ‘이건명, 선우…’로 적혀 있는 것.
제작사인 클립서비스 측은 “경력이나 나이는 선우가 위지만 뮤지컬 배우로서 지명도는 이건명이 높은 만큼 주인공에 더블 캐스팅된 두 사람이 모두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이름 순서만 바꿔 포스터를 반반씩 찍었다”고 말했다.
17일 막이 오르는 뮤지컬 ‘에비타’의 제작진도 배우의 이름 게재 순서를 놓고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요즘 뮤지컬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두 여배우 배해선과 김선영이 주인공에 더블 캐스팅됐으나 둘이 동갑내기인데 다가 티켓 판매량도 거의 차이가 없을 만큼 막상막하의 인기를 누리고 있어 순서를 결정하기 힘들었던 것. 제작사는 결국 데뷔 연도까지 거슬러 따진 끝에 배해선의 이름을 앞에 넣었다.
뮤지컬 제작자들에게 ‘빌링’(billing·포스터 등에 들어가는 배우 이름) 순서가 새로운 고민거리로 떠올랐다. 스타시스템이 정착한 영화와 달리 공연계는 전통적으로 선후배 서열을 중시해 왔으나 최근 뮤지컬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선배 우선’의 관행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 톱스타 조승우와 뮤지컬 전문 배우 류정한이 더블 캐스팅됐던 ‘지킬 앤 하이드’의 경우 경력이나 나이가 아래인 조승우가 류정한보다 이름이 먼저 나왔고, 류정한 역시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에서는 함께 주인공을 맡았던 뮤지컬계 선배 김성기보다 “마케팅 효과가 더 크다”는 이유로 앞자리를 차지했다.
오디 뮤지컬 컴퍼니 신춘수 대표는 “최근 영화배우나 가수 등 대중 스타들이 공연계에 활발하게 진출하는 데다 뮤지컬 전문 배우들도 스스로를 스타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이름 나가는 순서가 민감한 문제가 됐다”고 말했다.
심지어 조연으로 딱 한 장면에만 출연한 어느 뮤지컬계 중견배우는 포스터에서 자신의 이름이 주인공 역의 새까만 후배에 이어 네 번째로 등장하자 제작사 측에 거세게 항의하기도 했다. 결국 제작사 측은 부랴부랴 극장 주변의 포스터를 회수하고 ‘특별출연 ○○○’로 이름을 박은 새 포스터를 제작해야 했다.
그러나 연극에서는 아직도 주연이냐 조연이냐보다 배우로서 경력을 더 중시한다. 다음 달 막이 오르는 연극 ‘강철’은 엄마와 딸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당연히 엄마와 딸이 주인공이지만 정작 딸 역을 맡은 연극배우 서은경의 이름은 경력이 오래된 선배 조연 배우들에 밀려 포스터에서 네 번째로 등장한다.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