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는 말을 못 할 것이다. 대다수 국민이 아직도 통일을 민족의 지상 과제로 여기고 있는 터에 한 표가 아쉬운 대선 정국을 앞두고 통일을 단념하자는 말은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정치가가 말을 않는다 해서 현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침묵으로 은폐되는 것도 아니요, 개선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표에 관심 없고 권력에 욕심 없는 누군가 말을 해야 한다. 게다가 오늘날 북쪽의 꼬락서니와 그동안 끌려 다닌 남쪽의 대북정책(?)을 보아 온 많은 국민은 이제 통일을 ‘필수과목’ 아닌 ‘선택과목’쯤으로 생각하는 ‘통일 피곤증’의 증후군마저 보이고 있다.
한반도의 분단 현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하고 인식하고 수용함으로써 비로소 현실적인 대응이 가능하다. 현실 아닌 환상에서 출발한다면 어떤 대응도 혼란만을 확대 재생산할 뿐이다.
현실은 한반도에 두 개의 국가 수준의 권력체계가 존재하며 늦어도 남북이 유엔에 동시 가입한 이후엔 우리도 그를 국제법적으로 승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구두선처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 염원한다 해도 이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남북의 정상이 평양에서 화기 넘치게 악수하고 포옹했다 해도 달라진 것은 없다. 오히려 평양에서의 만남은 남북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사실을 국가 원수의 차원에서 전 세계에 유감없이 시위한 것에 불과하다. 건전한 상식을 가진 외국 관찰자는 다 그렇게 본다.
분단 현실 있는대로 바라봐야
같은 민족이지만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두 국가인 것처럼 같은 민족이지만 남북은 두 개의 국가이다. ‘한 민족, 두 국가’라 해서 남북의 국가관계가 다른 국가와의 그것보다 훨씬 정겹고 친밀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환상이다. 남북은 형제이기 때문에 당연히 ‘동족끼리’ 돕는다는 것도 때로는 환상을 넘어 기만일 수 있다.
물론 남북은 틀림없는 형제요, 동족이다. 그러나 그것은 카인과 아벨도 형제였다는 뜻에서 형제요, 300만 명의 동족을 희생시킨 6·25 남침전쟁도 서슴지 않은 동족이라는 의미에서 동족이다.
우리가 북을 돕자는 것은 폭정에 시달리며 굶주리고 있는 그곳 주민을 그대로 볼 수 없어서이지, 그들을 기아 상태로 방치하는 평양의 권력층이 ‘동족’이라서가 아니다. 아프리카에서 또는 동남아에서 대량의 주민이 굶어 죽는다면 우리는 동족이 아니라 해도 그들을 도와줘야 하고 도울 것이다.
한반도의 복수국가체제란 삼국통일 이후 우리에겐 기억도 아득한 역사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는 객관적인 현실은 어떻든 심정적인 차원에서 북을 ‘타국’이라 느끼지 못하고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은 북은 지구상의 어떤 타국보다도 접근하기 어려운 곳, ‘입국’ 비자를 받기 어려운 곳, 비자를 받아도 아무 데나 가 보기 어렵고 아무나 만나기 어려운 곳, 외국보다도 더 먼 타국이 돼 버렸다.
정치와 이념, 사회와 경제 체제가 전혀 다른 남북의 이질적인 두 국가가 통일을 한다? 한쪽을 무력으로 정복하면 가능할 수 있다. 베트남처럼. 그러나 북의 남침전쟁은 실패했고 분단의 골만 더욱 깊게 해 놓았다. 혹은 남북의 한쪽이 제풀에 무너지면 평화적으로도 통일은 가능하다. 동서독처럼.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흡수통일’이란 묘한 이름으로 몰아 반대한다. 결국 무력통일도 평화통일도 반대한다는 것이다. 통일을 사실상 단념한 셈이다. 다만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용기가 없어 정치인은 침묵하고 이따금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헤식은 노래로 공허한 마음을 감출 뿐이다.
北에 따질 건 따져야 한다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자. 그래서 먼 훗날은 몰라도 우리가 책임져야 할 예측 가능한 미래까지는 ‘위신 있는 평화’를 위해 통일은 단념한다고 떳떳이 밝히자. 그럼으로써 우리는 북에 대해 여느 다른 외국에 대해서처럼 할 말은 하고 따질 것은 따지자. 일본의 핵 보유가 위험한 것처럼 북의 핵 보유도 위험하다고 항의하고 그에 대한 전 세계의 조치에 동참하자. 그럼으로써 평양의 무지렁이에게 국제사회에서 살기 위한 최소한의 행실을 공부할 기회마저 박탈하지는 말자.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 大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