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의 연애/심윤경 지음·328쪽·9500원·문학동네
《3년의 계약결혼
남자는 재경부 공무원 여자는 지하상점 판매원
남자는 사랑을 주고 싶지만
여자는 모든 것이 성가시다
단지 바라는 것은
숙식을 제공받는 것뿐…》
여자는 영혼을 기록하는 사람이었다. 영혼이 찾아와 들려주는 이야기를 여자는 귀 기울여 받아 적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여자의 이름은 이진이다.
남자는 재정경제부 공무원이었다. 지하 상점에서 일하지만 돈 계산을 지지리도 못하는 여자에게 남자는 한눈에 반했다. 남자의 이름은 이현. 여자가 결혼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사랑을 멈출 수가 없었다.
심윤경(34) 씨의 새 장편 ‘이현의 연애’는 연애소설이다. 사랑하는 여자에게서 사랑받지 못하는 남자가 겪는 마음의 고통을 그렸다. 장편이 장기인 작가답게 이야기가 술술 읽힌다. 화려하진 않지만 공들인 침착한 문체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작품에 몰입하도록 돕는다.
남자가 제안한 3년의 계약 결혼. 신부 이진은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아내 이진과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육식도 기름기 있는 음식도 입에 대지 않는 아내 때문에 지루한 식단을 감당해야 했고, 나눌 수 있는 취미도 없어 관계는 사무적이었다. 때때로 정사 장면이 나오지만 육체관계의 달콤한 아름다움만 묘사될 뿐, 섹스하는 남녀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에 대해선 깨끗하게 배제돼 있다.
“아름답고 외로운 아내에게 그가 해 줄 수 있는 일들은 몹시 한정되어 있었다. 그녀가 이현에게 바라는 것은 숙소와 식사를 제공해 주는 것뿐이었다…. 이현이 이진에게 사랑의 이름으로 주고자 하는 모든 것이 이진에게는 다 성가시고 부담스러운 ‘잔업’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 그는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보답 없는 헌신에 지쳐 가던 차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파국이 온다.
그렇지만 이 소설의 매력은 그저 연애소설로만 읽히지는 않는다는 것. 작가는 ‘진실’의 ‘진’을 따서 이진, ‘현실’의 ‘현’을 따서 이현으로 주인공의 이름을 지었다고 설명한다. 진실에 매혹되고 화합(결혼)하려고 온힘을 다했지만 좌절하는 현실을 은유했다는 것이다. 젊은 날 도덕적 열정으로, 사회의식으로 충만했던 선배들이 취직하고 결혼해 살면서 생활에 함몰된 것을 보고 애틋했다는 작가. 그것은 또한 모든 인간의 운명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소설로 그려 보기로 했다고 작가는 설명한다.
“그렇지만 연애와 사랑 얘기이기도 해요. 사랑도 인간에게는 운명적인 것이잖아요. 어떻게 읽는지는 독자 마음인 거죠.”
그 역시 언제나 독자였을 때의 마음을 잊지 않고 작품을 쓰려 한다.
장편 공모를 통해 등단한 심 씨는 단편 위주의 문단 풍토와 달리 장편 창작에 몰두해 왔다. 단편을 발표하긴 했지만 소설집을 묶기보다는 단편이 사이사이 들어가는 형식의 장편을 일찌감치 구상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현의 연애’에는 그가 써 놓은 단편 넷이 ‘이진의 기록’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들어가 있다. 이진이 떠도는 영혼들의 얘기를 듣고 기록했다는 다소 황당한 설정이다. 직장이 없는 남편 때문에 힘들게 가장 노릇을 해야 하는 아내, 가족에게 미움만 받는 작은오빠 때문에 마음 상하는 여동생…. 이 단편들은 절절한 사랑 얘기 중간중간에 삽입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사랑 아닌 절실한 감정들도 얼마나 많은지를 낯선 방식으로 보여 준다.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로도, 어른을 위한 우화로도 읽을 수 있는 소설. ‘이현의 연애’는 짝사랑에 애달파 하는 이들, 청춘의 열정을 스스로 배신한 사람들의 가슴에 꽂히는 비수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