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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사-농부도 “세종대왕님 옆에 서도 될까요”

입력 | 2006-11-18 02:57:00


‘꿈에 한 도사가 나타났다. 흰 수염을 휘날리며 도사는 말했다. “장차 조국의 운명을 책임질 아이가 태어날 것이니 이름을 ○○라고 지어라.” 아이가 태어나던 날 하늘에서 커다란 별똥별이 떨어졌다….’

과거 위인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구다. ‘위인=영웅’이던 시절, 위인전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부분 태어나면서부터 장렬한 죽음을 맞을 때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고결한 삶을 산 것으로 묘사됐다.

하지만 이런 ‘박제화’된 위인전은 요즘 어린이에게 감흥을 주지 못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자신과 관계없는 ‘먼 나라’ 얘기로 느끼거나 위인과 자신의 삶을 비교하며 오히려 위축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

위인전의 변화는 곧 박제화된 영웅주의가 깨지는 과정이다.

1990년대 이후 평가가 엇갈릴 수 있는 동시대의 인물, 생존 인물을 위인전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것도, 영웅은 아니지만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인물들을 위인으로 소개하는 것도 이런 고민의 결과다.

○임금-장군 등 ‘박제화된 영웅’ 역사 속으로

1990년 이전 출간된 위인전집을 보면 독립운동가가 독자와 시간적 거리가 가장 가까운 위인이었다.

어린이 문학연구가인 오진원 씨는 이런 관행이 1990년 출판사 ‘산하’가 어린이 위인전으로 ‘전태일’을 발간하면서 깨졌다고 설명했다. 노동자, 그것도 분신을 한 노동자를 어린이 위인전으로 소개한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엔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는 것. 전태일 전기를 시작으로 출판계에선 동시대 인물에 대한 탐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94년 ‘사계절’이 ‘민주주의의 등불 장준하’, ‘인권 변호사 조영래’ 등 1970, 80년대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인물을 잇달아 소개하면서 위인의 폭이 크게 넓어졌다.

다양한 인물이 위인전에 등장하면서 기록 형태도 달라졌다. 한 인물의 성과와 능력만을 부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의 잘못된 판단과 실패, 좌절 등 부정적인 면도 함께 소개되기 시작했다.

○‘살아있는 위인’시대… 예술가-전문가 부상

1990년대 후반부터는 생존 인물이 대거 위인전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1998년 ‘우리교육’은 ‘새 박사 원병오 이야기’를 시작으로 ‘큰 소리꾼 박동진 이야기’, ‘물고기 박사 최기철 이야기’, ‘옥수수 박사 김순권 이야기’, ‘거미 박사 남궁준 이야기’, ‘아름다운 농부 원경선 이야기’ 등 각 분야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생존 인물의 전기를 연달아 출간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박정자 씨의 연극인생을 담은 ‘얘들아, 무대에 서면 신이 난단다’, ‘밥퍼 목사’로 유명한 최일도 목사의 이야기인 ‘당신이 영웅입니다’, 만화가 박재동 씨를 다룬 ‘밥보다 만화가 더 좋아’와 같이 대중문화와 뉴스의 주인공으로 익숙한 인물이 위인전 형태로 소개됐다.

지난해 초 출간된 ‘나는 무슨 씨앗일까?’는 컴퓨터 의사 안철수 씨, 생물학자 최재천 씨, 국내 최초의 시각장애인 박사 강영우 씨, 주방장 박효남 씨, 나무박사 서진석 씨 등 전문가 9명의 삶을 다뤄 지금까지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마오쩌둥도 등장… 아웃사이더 새롭게 조명

1990년대 이후 출판계에선 역사 속에 묻혀 있는 인물을 발굴하려는 시도도 활발히 이뤄졌다.

1994년 ‘한길사’는 ‘겨레의 역사를 빛낸 사람들’이란 시리즈물을 내놓았다. 이 위인전집에는 만적, 정인홍, 정여립, 임경업, 홍경래, 최시형, 전봉준, 신돌석 등 민란을 일으킨 인물이 대거 포함됐다. 기존 위인전에선 전혀 다뤄지지 않았던 역사의 ‘이단자’들이 위인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대중에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고려, 조선시대 과학자나 예술가를 다룬 책들도 속속 출간되고 있다.

어린이 위인전에 좌파 인물이 등장하고 있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 지난해 ‘작가정신’에선 피델 카스트로와 마오쩌둥(毛澤東)의 위인전을 출간한 데 이어 올해 ‘아이세움’에선 여성 사회주의 혁명가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전기를 발간했다.

오진원 씨는 “신격화된 인물의 모든 행동은 위인이라는 이유로 지나치게 미화되곤 하는데 이는 아이들이 자신의 꿈을 설계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미선 한우리 독서문화운동본부 독서지도 전문강사는 “엄청난 업적을 남기지 않은 인물도 위인전에 등장하는 시대가 왔으니 위인전이란 표현 대신 ‘인물이야기’라고 쓰는 게 더 적절하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세상 변했건만 ‘불변의 女위인’

1990년대 이후 위인전이 큰 변화를 겪으며 다양한 인물군(群)을 발굴했지만 여성 위인만은 예외다.

신사임당, 유관순(사진), 퀴리 부인, 헬렌 켈러, 나이팅게일 정도가 여성 위인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새롭게 소개되는 여성 위인이라면 테레사 수녀 정도다.

전문가들은 이런 남성 중심의 위인전이 여학생들에게 제대로 된 역할모델을 심어 주지 못해 오히려 위인전 독서의 효과를 반감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일반적으로 자신과 위인을 동일시해야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데 이성보다는 동성일 때 동일시 과정을 쉽게 밟는다.

그런 면에서 2001년 12월 ‘아이세움’이 펴낸 ‘여성 인물이야기’는 큰 관심을 끌었다. 당시 아이세움은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인 이태영과 한국 최초의 여기자인 최은희, 여성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한 비행사 아멜리아 이어하트 등을 잇달아 소개했다.

‘교학사’가 세상을 바꾼 여자들의 빛나는 도전 이야기라는 부제와 함께 출간한 ‘여자는 힘이 세다’ 역시 여성 위인을 새롭게 발굴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 책에는 무용가 최승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잔 다르크 정정화,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세계적 소프라노 조수미, 동물학자 제인 구달, 미얀마의 민주투사 아웅산 수치 여사 등 다양한 여성 위인의 삶이 담겨 있다.

‘내 딸들을 위한 여성사’의 저자인 정기문 군산대 사학과 교수는 “여성 위인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남성우월주의에 묻혀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