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남성 작가들의 소설이 잇따라 발표되고 있다. 성(性)의 성격과 위상이 급격하게 변하는 시대와 맞물린 흐름이다. 작가 김탁환 씨(왼쪽)와 여성 주인공을 등장시킨 장편 ‘리심’의 표지 이미지.
20%대의 높은 시청률로 인기를 모으는 TV드라마 ‘황진이’. 30, 40대 여성층에 특히 인기 있는 이 드라마의 원작은 김탁환(38) 씨의 장편소설 ‘나, 황진이’다. 김 씨는 ‘나, 황진이’를 비롯해 ‘열녀문의 비밀’ ‘리심’ 등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을 잇달아 펴냈다. 19세기 말 조선의 무희 리심의 일대기를 그린 최근작 ‘리심’은 2만 질(6만 부) 이상 팔렸다. 남성 작가이면서도 섬세하고 단아한 문체로 여성의 내면을 묘사한 것이 특히 주목을 받았다.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남성 작가는 김 씨뿐이 아니다. 최근 장편 ‘말하지 못한 내 사랑은’을 출간한 이해경(43) 씨도 그렇다. ‘말하지 못한 내 사랑은’은 젊은 여성 연우와 옛 남자친구, 현재 애인, 현재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다룬 소설. 작가 이 씨는 “남성 작가로서 남성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소설을 쓰는 게 편안하고 익숙한 게 사실이지만,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올해 나온 김훈(58) 씨의 단편집 ‘강산무진’에도 50대 자매들을 통해 인생의 황혼기 쓸쓸함을 묘파한 단편 ‘언니의 폐경’이 실려 있다. “마치 여자로 살아봤던 것 같다”는 누리꾼 독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이렇듯 남성 작가들이 여성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최근 문학의 새로운 경향이다. 여성 작가들의 경우 1990년대 이후 문단의 주요 흐름을 형성하면서 남성을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을 많이 선보였지만, 남성 작가들은 ‘여장(女裝)’을 꺼렸던 게 사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이런 흐름이 시대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분석한다.
평론가 손정수 씨는 “새로운 세기에 접어들면서 성 역할의 혼란과 전도 현상을 급진적 방식으로 경험하고 그에 근거한 문화적 코드들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면서 “최근 남성 작가들의 소설도 사회 문화적 변화에 대응하는 문학적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남성 작가들이 여성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성(性)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와 맞물린다는 지적이다.
평론가 신형철 씨도 “남녀에 대한 구별 자체가 모호해지는 요즘 세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2000년대 이후 메트로섹슈얼(패션에 민감하고 외모에 관심이 많은 남성), 크로스섹슈얼(여성적인 치장을 즐기는 남성) 등 여성화한 남성상이 등장한 것이 문학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남성 작가들도 내면의 여성성을 발견했다고 고백한다는 사실이다. 대부분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교육을 받고 자란 30대 후반 이상의 남성 작가들이 작품을 통해 “내 안에 두 성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김탁환 씨), “내 안의 여성성을 들여다봤다”(이해경 씨)라고 털어놓았다. 김훈 씨는 “한쪽 성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핍”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들은 “남자라서 절대 그릴 수 없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집필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면서도 의미 있는 실험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들뿐 아니라 김도언(35) 씨가 출간한 소설집 ‘악취미들’에 실은 단편 ‘지붕 위의 날들’과 ‘밤하늘은 호수다’, 김연수(36) 씨가 최근 문예지에 발표한 단편 ‘네가 누구건, 얼마나 외롭건’과 ‘기억할 만한 지나침’ 등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은 남성 작가들의 소설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