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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홍찬식]신용카드와 포퓰리즘

입력 | 2006-11-25 03:02:00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은 “기울어진 것은 바로잡을 수 있고 엎어진 것은 일으켜 세울 수 있지만 망한 것은 회복될 수 없다”고 했다. 북한의 핵실험 이후 한국 사회는 일단 평정을 되찾은 듯 보이지만 비관론도 여전히 만만찮다. 우리가 과연 국내외적 난관을 극복해 나갈 수 있겠느냐는 데 대한 회의적 시각이다. 남북 분단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공동체가 똘똘 뭉쳐 있어도 힘든 일인데 곳곳에 증오의 정서가 짙게 깔려 있고 민심은 동요하고 있다. 나라의 근간을 위협하는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이 번지기에 적합한 조건이다.

▷포퓰리즘이 자주 목격돼 온 중남미에서 포퓰리즘 정치가 퇴조 기미를 보인다고 한다. 내 집을 마련하고 신용카드를 발급받은 계층이 늘어나면서 포퓰리즘 정책을 내놓는 정치가들이 외면받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용카드는 미래의 수입을 미리 당겨 쓰는 지불 방식이다. 수입이 지속적으로 보장돼야 신용카드를 계속 쓸 수 있으니까 사용자들이 눈앞의 인기 정책보다 경제적 안정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신용카드가 허상을 바로 보게 만든 셈이다.

▷한국의 40대 이상은 배고픈 시절을 거쳤던 사람들이다. 가난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 참아 낼 줄도 안다. 만약 경제가 지금보다 후퇴한다면 누구보다 괴롭게 느낄 사람은 젊은 세대일 것이다. 생활수준의 갑작스러운 후퇴는 ‘재앙’에 가까울 것이다. 중남미의 반(反)포퓰리즘 움직임은 그들의 뼈저린 경험이 배어 있는 것이기에 흘려 넘길 일이 아니다.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衣食)이 풍족해야 영욕을 안다.’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유명한 관중의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경제적으로 안정돼야 사람들이 예의를 차리고 수치(羞恥)도 알며 나라가 제 모습을 갖춘다는 뜻이다. 조선 초기의 개혁정치가 정도전 역시 ‘정치는 백성의 의식을 풍족히 해 주는 것’이라고 꿰뚫었다. 오늘의 혼란상은 정권의 경제 정책 실패에 큰 책임이 있다. 국민도 정치와 정치인의 옥석(玉石)을 가리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중남미와는 다르게 고통을 겪지 않고도 깨달았어야 했지만 이미 고통이 크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