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를 피할 때는 미끄럼틀 아래서/오카다 준 글·이세 히데코 그림·박종진 옮김/136쪽·8000원·보림
키가 크고 1년 내내 검은 옷만 입는다. 파이프 담배를 즐긴다. 초콜릿을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다.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없다. 나이는 예순 살쯤 됐을까. 스카이 하이츠 맨션 201호에 혼자 사는 아마모리 씨 얘기다.
이 판타지 동화는 수상하기 짝이 없는 아마모리 씨가 아파트 공원을 지나가다 갑자기 우뚝 멈춰 서서 옆구리에 끼고 있던 우산을 펼치는 것으로 시작한다. 놀랍게도 기다렸다는 듯 비가 쏟아지고 야구 놀이를 하던 아이들은 비를 피해 미끄럼틀 아래로 들어간다.
“다들 봤지? 이 비는 아마모리 씨가 내리게 한 거야. 저 사람 짐작했던 대로 마법사가 틀림없어.”
초등학교 2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 같은 아파트에 사는 10명의 아이들은 ‘내가 겪은 아마모리 씨’를 소재로 신기한 경험담을 털어놓으며 수수께끼 같은 인물의 정체를 퍼즐 맞히듯 풀어간다.
506호에 사는 데루오(중학교 1년)가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 4학년이던 가을, 아버지와 둘이서 막 이사 왔을 때 데루오는 무척 외로웠다. 전학 온 지 사흘째 되던 토요일 오후 데루오는 아파트 발코니에서 공원을 내려다보며 거푸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전에 살던 데가 좋았는데….”
바로 그때 어디선가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기도 그렇게 나쁘진 않단다.” 아마 아마모리 씨였던 것 같다. 그날 밤 데루오는 아마모리 씨로 추정되는 사람이 일러준 대로 공원 미끄럼틀에 올라가 지휘봉을 집어 든다. 갑자기 아파트 주민들이 발코니로 나오더니 왈츠를 연주하기 시작하고 데루오는 정신없이 지휘봉을 휘두른다. “여기서도 틀림없이 즐겁게 지낼 수 있을 거야.”
엄마와 둘이 사는 유키(초등 5년)는 이기적인 엄마가 못마땅하다. 젊고 예쁜 건 좋은데 “엄마, 오늘 학교에서…” 하고 유키가 말을 시작하면 “그보다 내 말 좀 들어봐” 하며 엄마는 직장에서 일을 잘해 칭찬받은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어느 날 새벽녘 유키는 엄마와 한바탕 말싸움을 벌이고 ‘이 집에는 외로운 어린아이 둘이 산다’고 생각하며 발코니에 나와 앉아 있었다. 그때 공원 바닥에서 생겨난 그림자가 “안녕” 하고 말을 걸어오고 그림자와 인사하기 놀이를 하며 꽁한 마음이 풀어진 유키는 술을 마시다 식탁에 쓰러져 자는 엄마를 담요로 덮어준다.
아마모리 씨가 건네준 열쇠로 403호 문을 열자 바다가 펼쳐졌다던 이치로(초등 6년) 이야기, 커다란 종이비행기를 타고 밤하늘을 날아다녔다는 노부코(초등 4년) 이야기…. 어느덧 비가 그치고 꿈같은 이야기가 끝나갈 즈음 아마모리 씨의 정체도 서서히 밝혀진다. 그리고 아이들은 뜻밖의 수확을 거둔다. “다들 아마모리 씨를 알게 됐다고 했지만, 난 아이들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아.”
조각조각 다채로운 아파트 아이들의 일상과 고민을 아마모리 씨라는 신비로운 인물을 실과 바늘 삼아 정교하게 기워낸 솜씨가 돋보인다. 1986년 출간돼 산케이 아동출판문화상을 받았다. 데루오의 ‘스카이 하이츠 오케스트라’ 이야기는 일본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