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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77년 복서 홍수환, 카라스키야에 역전승

입력 | 2006-11-27 03:00:00


“고국에 계신 국민 여러분, 그리고 이역만리에서 이 경기를 지켜보고 계신 해외 동포 여러분….”

방송은 보통 이렇게 시작했다.

거리에 인적은 끊겼고 역 대합실은 중계를 보려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꼬마들도 권투 글러브를 끼고 마치 자신들이 링에 오른 것처럼 TV 앞에 섰다.

국가 경제가 보잘것없던 시절. 우리 편이 맞으면 전 국민이 아팠고, 상대를 링 바닥에 때려 뉘면 모두가 환호했다.

우리 선수가 ‘세계 챔피언’을 따는 날은 온 국민이 민족의 긍지를 느꼈다.

1977년 11월 27일은 바로 그런 날이었다.

우리 편은 프로복싱의 ‘풍운아’ 홍수환. 상대는 살인적인 KO 펀치를 자랑하는 파나마의 엑토르 카라스키야였다.

경기 초반부터 패색이 짙어보였다. 홍수환은 소나기 펀치를 맞고 2회에 4번이나 링에 주저앉았다. ‘지옥에서 온 악마’라는 카라스키야의 별명은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운명의 3회전.

홍수환은 카라스키야를 무섭게 로프로 몰아붙이더니 레프트 훅으로 중심을 잃게 했다. 이어지는 좌우 스트레이트, 그리고 마지막 레프트 한 방에 의기양양했던 카라스키야는 바닥에 드러눕고 말았다.

그가 두 번째 세계챔피언 벨트를 따내는 순간. 1만6000여 파나마 관중은 말을 잃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날 기적의 드라마를 이렇게 보도했다.

‘이미 승부는 끝난 거와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홍수환은 이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홀딩 한 번 하지 않은 채 오히려 저돌적인 인파이팅으로 맞서 절망의 위기를 뚫고 나갔다.’

“맞고 쓰러져도 준비한 게 아까워서 다시 일어났다. 노력한 사람은 절대 포기 못한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국민의 영웅을 위해 정부 당국은 성대한 축하 행사를 준비했다. 누가 일일이 세어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한 방송사는 홍수환의 승리 장면을 27번이나 반복해 내보냈다고 한다.

사실 그는 이날 승리보다 1974년 첫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차고 어머니와 나눈 대화로 더 유명하다. 국민은 이 장면에서 눈시울을 붉혔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그래, 대한민국 만세다.”

어머니에게 홍수환은 자식만을 뜻하는 게 아니었나 보다. 그는 온 국민이 응원한 대한민국이었다. 정말 그런 시절이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