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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의 별]김형국 교수의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 예찬

입력 | 2006-12-02 03:00:00

동아일보 자료 사진


강동석(사진)을 처음 만난 곳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상위 입상한 지 이태 뒤인 197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였다. 인근에서 학위 공부를 할 땐데 기숙사에서 친했던 후배가 바이올리니스트 형이 연주차 왔다며 모친과 저녁을 하는 자리에 나를 청했다. 음악 이야기를 나눌 때 강동석을 좋아한다는 말을 후배가 기억했기 때문이다.

강동석은 중학교 1학년의 나이에 동아콩쿠르 대상을 받고 이후 도미했다. 인격 형성기에 홀로 지낸 유학길이었으니 씁쓸한 마음은 듣지 않아도 알 만한데, 못 다한 육친의 그리움 때문인지 형제 가운데 효심이 높다는 말에 내 마음은 찡했다. 후배도 어린 시절 유치원 대신 영어학원에 다녔을 정도로 그들 형제의 모친은 영재교육의 원조였다.

전후 복구가 시작되던 1954년에 난 강동석의 성장사는 우리 현대사의 한 단면이다. 나라에 자원이라곤 사람 몸뚱이밖에 없던 그때 서독으로 광원, 간호사가 외화벌이에 나가고 음악 영재들은 ‘손재주업’에 뛰어든다. 연주를 포함해 노동집약산업이 서구에서 사양길에 접어들자 세계 음악계는 이스라엘 출신이 틈새를 파고들었고, 우리가 그 뒤를 따르는데 정경화 씨 남매, 강동석 등이 그 대열에서 대성했다. 약소국가를 고무시킨, 중화학공장 못지않은 자랑이었다.

돌이켜보니 나의 고전음악 사랑은 초등학교 때 국어책에서 만난 글이 씨앗이었다. 달밤에 눈먼 소녀의 피아노 치는 소리를 듣고 베토벤이 월광 소나타를 작곡했다는 것. 이 줄거리가 일본발(發) 픽션임을 나중에 알았지만, 그때 베토벤이 궁금해졌다. 중1 때 집에 굴러든 예후디 메뉴인의 SP 음반을 듣고 대번에 고전음악에 빠져들어 일본 후쿠오카(福岡) 송출 음악방송을 계속 들었다.

대학 1학년 때 4·19혁명이 분출시킨 자유정신이 나를 세뇌시킨 것은 삶에 대한 능동성이었다. 방학을 맞아 배워 보겠다고 싸구려 바이올린을 산다. ‘촌놈’이 본 것이라곤 풍금과 깽깽이가 고작인지라 바이올린이 친숙했다. 고향 마산에는 월남한 가곡 작곡가 조두남의 피아노 교실 말고 변변한 교습소가 없었다. 겨우 삼류 선생의 전수생 아들에게 동냥 배움을 얻었다.

내 욕심도 바이올린을 취미로 삼기보다는 기본 주법(奏法)을 좀 배워 음악 감상의 심도를 더하자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두 줄을 동시에 긋는 소리, 핑거보드에 줄을 누르지 않는 높은 소리도 가리게 되었지만, 기껏 기본 음정 잡기에 매달리다가 배움은 흐지부지됐다.

하지만 그 의욕의 여파로 음악책을 즐겨 읽는다. 헝가리 피아니스트 안도르 폴데시의 ‘피아노에의 길’도 그 가운데 하나. 감상자에게도 퍽 교훈적이었으니 “음악은 기교보다 창작적 상상력이 우선”이란 베토벤의 말을 인용한 것은 지금도 기억한다. 국내외 바이올린계 동향도 관심사였다. 좋은 바이올린이란 선승(禪僧)의 평정심, 투우사의 용맹성, 파티에 나선 귀부인의 여우짓이 어우러져야 한다는 야샤 하이페츠의 인터뷰는 “흥겨우나 넘치지 않고 슬프지만 비탄스럽지 않음(樂而不流 哀而不悲)”이 좋은 거문고라 한 우리 전래 음악관과 다름없었다.

전해 들은 강동석의 개가(凱歌)는 희비 교차였다. 미국의 콩쿠르 둘 우승에 이어 저 유명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도 메뉴인의 극찬을 받고 입상하자 정상의 음반회사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시벨리우스 협주곡을 출시했다. 우린 그의 연주를 들을 수 없었다. 영재에 대한 병역 특혜가 없었기 때문이다.

금의환향한 것은 1983년이었다. 맑은 외모, 탁월한 기량에다 미뤄진 대망의 연주여서인지 청중의 호응은 폭발적이었다. 한편 이름난 명기가 아닌 그것도 외국인 부호에게 빌려 연주했다는 후문에 신문사로 명기 구입에 보태라는 성금도 답지했다. 그의 반응은 ‘좋아서 시작한 음악이 남에게 동정을 살 일인가’하는 의연함이었다.

강동석도 타고난 음악가다. 타고난 재주는 시샘을 받기 마련인지, 메뉴인이 그랬듯이, 개인적 좌절도 굽이굽이라 한다. 그는 영재가 누릴 만한 사회적 도움을 받지 못해서인지 줄곧 혼자 꿋꿋했다. 오히려 고국에다 좋은 음악성을 환원하려고 애쓴다. 파리를 근거로 세계 무대에 서는 사이에 연세대 특임교수로 후진 양성에 열심인가 하면, 국제적 동료들을 모아 여름마다 프랑스 휴양지 쿠쉐빌에서 꾸려온 뮤직알프(MusicAlp) 실내악 축제를 서울에도 심으려고 2년이나 애썼다. 하지만 민간시장에서 적자만 보았다.

마침내 ‘강사모(강동석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들의 청으로 올봄 서울시 산하 서울문화재단이 ‘하이 서울’ 행사의 하나로 삼는데, 내가 집행위원장, 그가 음악감독이 된 서울스프링 실내악축제는 대성황이었다. 축제 때 개근한 한승수 전 외무장관은 미국 아스펜 축제보다 낫다 했다. 삐쭉빼쭉하기 쉽다는 국내외 유명 음악가를 잘도 모아 거둔 성공은 과묵 속에 숨은 그의 인덕도 하나의 열쇠였다. 축제의 목표이던 후진 발탁도 결실을 본다. 그때 축제에 나온 하이틴 김선욱이 지난 9월, 피아노의 출세 길 영국 리즈 콩쿠르에서 우승한다. 경사의 축하 대열에 나도 빠질 수 없지만, 내심은 세계에서 연주 요청이 쇄도할 그를 내년 축제 무대에서는 만나기 어렵겠지 싶어 걱정이다.

선진국으로 가는 지름길은 착하게 나아가는 ‘선진(善進)’이라 했는데, 강동석 시대 영재들이 물꼬를 터준 음악 선진은 이제 김선욱으로 이어졌다. ‘물방울’ 화가 김창렬은 “훌륭한 화가는 시대마다 있지만 인간의 영혼을 건드린 화가는 드물다”면서 당대에 영혼을 울리는 좋은 음악가를 선망했다. 그래서 파리의 이웃인 강동석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김형국 서울대 교수·지역개발

■“박경리… 장욱진… 아니, 강동석 씨로”

김형국(사진) 교수의 문화예술 애호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를 흠모해 토지 완간 기념행사 준비위원장과 토지문화관 건립위원장으로 이어지는 가연(佳緣)을 맺은 것이 문화계의 미담이 된 지는 오래다. 또 서양화가 고 장욱진 화백의 평전을 쓸 만큼 미술에 대한 안목도 높다.

이처럼 문화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그에게 ‘내 마음 속의 스타’를 주문한다는 것은 매우 난감한 과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김 교수는 고심 끝에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의 카드를 뽑았다. 본인은 “내가 강동석의 팬이라는 게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자신보다 젊은 예술가를 택함으로써 사람을 아끼고 좋아하는 것에 나이를 뛰어넘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김 교수의 강동석 사랑에는 2가지 요소가 교차한다. 하나는 그의 바이올린 선율에 담긴 비감미를 사랑해서다.

“원래 한국 사람의 몸속에 슬픔이 흐른다고 하잖습니까. 강동석의 선율엔 깊은 슬픔에 도달해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성적 정화가 느껴집니다.”

다른 하나는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 외로움과 싸우며 고군분투해야 했던 강동석의 삶 자체가 주는 감동이다.

“그가 유학할 당시 사정은 독일에 인력 수출된 한국인 광원들과 간호사들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그에겐 외로움과 앞일을 예측하기 어려운 불안감에 맞서서 자신의 꿈을 이뤄낸 고도성장기 한국인의 초상이 투영돼 있습니다.”

국궁 애호가로도 유명한 김 교수는 바이올린과 활쏘기의 유사성도 설명해 줬다.

“바이올린 연주에서 오른손으로 바이올린 활을 쓰는 기술인 운궁법(運弓法)은 활쏘기에서 시위를 당기고 놓는 손놀림(bowing)에 비견할 만합니다. 제가 활쏘기를 4년여를 배웠는데도 활시위를 당기고 튕기는 기술이 약한 것을 보면 바이올린 취미에 더 매달리지 않은 게 잘한 것 같습니다. 허허.”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