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한 정계 원로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는 ‘야당의 생명이 정책에 있는 것은 아니다. 야당에 세세한 정책을 주문하는 것은 무리다’는 뉘앙스의 말을 했다. 구체적인 정책을 세워 집행하는 것은 정부의 책임이고, 야당은 집권 측이 나라를 엉뚱하게 끌고 가지 못하도록 브레이크를 밟아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견이었다.
야당이 국리민복에 기여할 정책을 제시한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실현되기는 어렵다. 국익과 민생에 직결되는 국정 수행의 핸들은 어차피 정부 여당이 쥐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점이 ‘국민의 눈물을 닦아 주지 못하는 야당’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노무현 정권 출범 이후 2004년 총선까지 1년 1개월 남짓은 한나라당이 국회의석 과반 야당이었다. 그럼에도 ‘반대를 위한 반대, 노(盧) 흔들기’ 끝에 탄핵 역풍을 맞은 ‘네거티브 정치’ 말고는 기억되는 게 별로 없다.
총선 이후에도 2년 8개월째 한나라당발(發) ‘희망의 정치’는 보이지 않았다. 과반 미달의 한계가 있었겠지만, 노 대통령과 여당이 무슨 ‘간판’을 올리면 ‘저 간판 잘못됐다. 떼어라’고 외마디를 지른 것뿐이다. 최근의 ‘전효숙 사태’ 대처나 국방개혁법안 심의 과정에서도 한나라당 전체가 민주당 조순형 의원 한 사람보다 나았다고 볼 수 없을 정도다.
‘게으르고 무책임’ 與와 난형난제
한나라당이 간판 먼저 올리고 뭘 좀 보여 주나 싶었던 게 있다면 2004년 말에 띄운 ‘선진화 비전’이 고작이다. 그조차 생명력 있는 전략과 행동계획으로 발전시키는 데 한나라당은 실패했다. 아니, 전력투구할 의지와 조직적 노력이 애당초 부족했다. 현 정부가 양산한 ‘날탕의 로드맵’과 다를 바 없는 무늬만의 비전이었다. 대통령이건 야당이건 잔머리 믿고 게으른 것 자체가 무능이다.
국정이 정상 궤도를 순항하고 있다면 한나라당이 하품만 하고 있어도 별로 얘깃거리가 안 된다. 그러나 지금은 정부 여당이 풍비박산 지경에 이르러 이들에게 국정 조정력을 기대하기 힘들게 됐다. 대통령은 인도네시아를 방문 중인 어제도 열린우리당 당원들에게 보내는 글을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려 통합신당파와 신경전을 벌였다. 한나라당이 정부 여당의 위기라고 반기며 강 건너 불구경하듯 즐길 상황은 아니다. 나라가 더 수렁으로 빠져든다면 국회 의석의 42%, 시도지사의 75%, 기초단체장의 67%를 품고 있는 거대 야당도 책임을 함께 져야 한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제1야당이던 새정치국민회의는 의석의 26%밖에 갖지 못했지만 환란(換亂)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당시 김대중(DJ) 총재가 이끌던 국민회의는 김영삼 정부와 여당 신한국당(한나라당 전신)을 흔드는 데 몰두했다. 노동시장 유연화 관련법, 13개 금융개혁법 등의 제정 및 개정을 집요하게 발목 잡았다. 기아자동차 등 부실기업 해법에 대해서도 포퓰리즘적 견제로 정부 여당을 괴롭혔다. 그 현안들이 제때 합리적으로 처리되지 못한 것이 환란의 한 원인이다.
DJ는 대통령이 됐지만 환란 탈출에 급급해 무리한 경기부양책을 썼고, 그 후유증이 노무현 정부로 넘겨졌다. 내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정권을 되찾는다 하더라도 지금부터 1년간 국정이 더 곪아 터지면 ‘만신창이 공화국’을 떠안고 힘겨운 씨름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한나라당이 수권정당의 자격을 인정받으려면 ‘대선 전(前) 1년’의 국가위기를 타개하는 데 온힘을 기울여 성과를 내야 한다. 그런 자세와 해결 능력을 보여 주지 못한 채 나태하고 무책임한 웰빙 정당 그대로 간다면 국민의 실망이 깊어질 것이다. ‘전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한나라당을 찍지 않겠다’는 절대 비호감층이 작년 여름 29%에서 올여름 31%로 늘었음도 명심할 일이다.
李·朴·孫국가위기 대응력 보여야
강재섭 대표, 전여옥 최고위원, 전재희 정책위의장 등 한나라당 지도부는 어제 ‘정책 차별화로 수권정당의 모습을 보이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이를 위한 고뇌와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반사이익당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명박, 박근혜, 손학규 3인도 이전투구의 당내 경합에만 몰입할 것이 아니라 국가 위국(危局)의 시기에 ‘힘을 모아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국민 앞에 보여야 한다. 지난 두 번의 대선 결과는 한나라당 대세론을 철저하게 비웃었다.
배인준 논설실장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