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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자생적 복지국가였다?

입력 | 2006-12-12 03:00:00


“병든 사람이 신고하면 월령의(月令醫)를 보내 치료하여 준다.” “양육이 어려운 죄수의 자녀들은 제생원에서 양육 보호한다.”

15세기에 완성된 조선왕조의 통치법전 경국대전의 일부분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전환은 복지 정책이라는 측면에서는 우리 역사의 커다란 획을 그은 시기였다. 적어도 조선 초기 건국세력은 근대적 의미의 복지에 대한 최소한의 개념을 공유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고려에서는 불교 사찰이 구호활동의 중심에 있었지만 조선에서는 국가의 주요 정책으로 자리 잡아 명문화됐다.

윤훈표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는 15일 성균관대 600주년기념관에서 열리는 학술대회 ‘유교와 행정’에서 ‘경국대전, 예전 복지 관련 조문의 분석과 그 의의’라는 논문을 통해 이 같은 내용을 발표한다.

조선의 복지제도는 경국대전 권3 예전 혜휼조에 기록돼 있으며 고아나 집 잃은 어린이, 가난으로 혼인을 못한 노처녀, 환자가 주요 구제 대상이었다. 예를 들어 어린이의 경우 ‘버려지거나 집 잃은 어린이는 한성부와 본읍에서 양육하기를 원하는 이에게 맡기고 관청에서 의복과 식료품을 준다. 10세가 넘도록 찾는 신고가 없으면 양육한 자가 부리는 것을 허용한다’고 돼 있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윤 교수는 고아의 구제를 적극적으로 장려하여 최소한의 기아라도 막으려는 시도로 설명했다.

또 ‘환자가 긴급히 의원을 요청하면 즉시 치료해야 하며 거부할 시에는 고발하게 하여 죄를 다스린다’고 돼 있다. 오늘날 논란이 되고 있는 병원의 ‘환자 거부행위’에 대해 구체적 대응을 마련하고 있었던 셈.

노처녀 구제방안도 선진적이었다. ‘나이가 30에 가깝도록 가난하여 시집가지 못한 여자에게는 곡식과 옷감을 헤아려 지급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당시 상황에서 혼인은 여성의 거의 유일한 삶의 수단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합리적이다.

윤 교수는 사회 구제책을 경제 제도를 모은 호전(戶典)이 아니라 예전(禮典)에 넣은 것 또한 조선 왕조가 복지정책에 대해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