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가 죽었다.
남편과 똑같이 감기약을 먹고 잤지만 부인만 목숨을 잃었다. 자살일까.
한데 석연치 않다. 여자는 남편이나 시어머니와 사이가 아주 안 좋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타살일까.
나중에 남편과 시어머니는 서로 “내가 쥐약을 먹여 죽였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이는 경찰의 고문에 의한 강제 자백으로 밝혀졌다.
이 흥미진진한 스토리는 실화다. 등장인물도 거물급이다. 죽은 여주인공은 한국 최초의 여성 판사인 황윤석 판사.
한 편의 미스터리 영화 같은 스토리의 시간적 무대는 196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황 판사는 촉망받던 법조인이었다. 서울대 법대 졸업, 1952년 고등고시 사법과(현재 사법시험) 합격, 1954년 법관 임용 등 엘리트 코스를 밟은 황 판사는 뭇 여성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1961년 4월 황 판사(당시 34세)는 그의 방에서 남편과 함께 의식을 잃었다. 부부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남편만 깨어났다.
‘한국의 첫 여판사가 변시체(變屍體)로 발견되다니….’ 세상은 시끄러웠다. 언론도 흥분했다.
경찰은 부부가 감기약을 똑같이 두 알씩 먹었는데 부인만 죽었고 남편은 처음 부인과 함께 병원에 실려 갔을 때 혼수상태를 가장(假裝)했다며 타살이라고 밀어붙였다. 반면에 평소 며느리와 사이가 나빴던 것으로 알려진 황 판사의 시부모는 독감이 들어 감기약을 복용한 게 사인(死因)이라고 주장했다.
검찰은 두 차례에 걸쳐 시신 감정을 했으나 독살의 흔적을 찾지 못해 남편을 석방했다.
이후 5·16군사정변 등으로 이 사건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다시 세상의 화제로 떠오른 건 그해 12월 12일경. 수사를 재개한 경찰이 황 판사의 남편을 유기치사 혐의로 구속한 뒤였다.
경찰은 평소 남편이 아내를 괴롭혔고 사건 당일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신속히 아내를 병원으로 옮기지 않아 죽음을 방치했다는 이유로 기소한 것이다.
남편은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상고해 2심에서 무죄로 풀려났다. 동시에 ‘황 판사 변사 사건’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되어 버렸다.
자살인가, 타살인가.
같은 해 12월 12일자 동아일보는 “죽은 사람이 말을 할 리는 만무하지만 황 판사 변사 사건처럼 죽은 사람의 입이 아쉬운 일도 드물게다”라고 답답함을 전했다.
김상수 기자 s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