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필리아의 그림자 극장. 그림=프리드리히 헤헬만, 베틀북 펴냄
‘그림자’라는 말은 그게 등장하는 문맥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미하엘 엔데가 쓴 이 그림책의 글에 등장하는 그림자들은 장난꾼, 무서운 어둠, 외로움, 힘없음, 덧없음 따위의 이름을 갖고 있는데, 실체가 없으며 의지할 데가 없다면서 ‘오필리아’라는 할머니를 찾아가 같이 살게 된다. 할머니는 평생 극장의 무대 밑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배우들이 대사를 잊어버릴 때 대사 불러 주는 일을 했는데, 그림자들과 살게 되면서 동네 사람과 집 주인이 이상하게 여겨 쫓겨나자, 그림자들이 의논해서 이동극장을 만들어 살아간다.
그런데 이야기야 어떻게 전개되든, 여기에 등장하는 그림자들의 실체는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무서워하고 외로워하며 무력감이나 무상감(無常感)에 사로잡힐 때도 있고, 때로는 장난을 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그림자들은 말하자면 심리적 차원에서 어른거리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실체와 그림자를 아예 구별하지 않는 통찰이 있다. 불교에서 ‘나’라는 건 없다고 하면서 모든 게 공(空)하다고 보는 것이나 13세기 이슬람의 신비시인 루미가 ‘대상 없는 사랑’이란 작품에서 “모든 게 실체 없는 그림자다. 당신은 자신의 그림자와 사랑에 빠진 사람을 봤는가? 그게 우리가 해 온 일이다”라고 말하는 경우 등.
나에게는 그림자가 조그만 깨달음의 계기가 된 적이 두 번 있는데, 하나는 어린 시절 시골에서 살 때 우물에 물 길으러 가서 여러 번 들여다본 우물 속에 비친 내 그림자. 그 속에 소리도 질러 보는 등 일종의 놀이로서 들여다보곤 했던 우물 속 내 그림자를 보면서 나는 스스로 잘 모르는 사이에 내가 하나의 타자(他者)라는 사실을, 마치 물이 스며들 듯이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사실 우물은 만상이 비치는 지구의 눈동자였으니까.
또 한번은, 단테의 표현대로 ‘반고비 나그네 길’에 젊은 사람들과 지리산 추성계곡에 가서 등산을 하고 민박을 한 일이 있는데, 술을 한잔하고 늦게 잠자리에 들었으나 방 안에서 뭐가 계속 바스락거려 일어나 불을 켜 보니 누가 장수하늘소 한 마리를 비닐봉지에 넣어 묶어놓아 그놈이 숨 가쁘게 부스럭거리는 것이었다. 그걸 들고 나가 집 뒤 산길에 풀어 주는데, 칠흑 같은 밤 바깥에 켜 놓은 등의 불빛에, 길 내느라고 자른 비스듬한 흙벽에 내 거대한 그림자가 찍혀 있는 걸 본 순간, 나는 경악하면서 동시에 그 그림자의 향기에 어지럽게 취했던 것인데, 왜냐하면 ‘나’는 흙벽에 찍힌 ‘그림자 화석(化石)’이었기 때문이다!
정현종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