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바람. 회색빛 콘크리트 벽은 차갑고도 높았다. 코트 깃을 올려 세운 수많은 인파. 그들이 내뿜는 입김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가족을 만난다는 희망의 풍선처럼.
1963년 12월 20일 독일 베를린.
동서를 갈라놓은 장벽의 유일한 통로, 브란덴부르크 문. 4000여 명의 서독 주민이 경계선을 넘어 동독으로 들어섰다. 베를린장벽이 세워진 지 2년 여. 동서독 정부가 허가한 최초의 공식 방문이었다.
끊으려 해도 끊어지지 않는 게 피붙이의 정. 벽 하나에 막혀 만나질 못했으니 애절함은 더했다. 부둥켜안은 어머니와 아들, 가족과 친구. 터져 나온 환호는 감격이 되고 이내 곧 눈물로 흘렀다. 두 번 다신 놓치지 않으리라.
기쁨은 찰나. 현실이 끼어들었다. 확성기의 거북한 인사가 허공을 갈랐다. “독일 민주주의 공화국(동독) 수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인사는 애교였다. 대대적인 프로파간다가 펼쳐졌다. 선전 책자가 주어지고 친절한 장벽 안내가 이어졌다. ‘제국 자본주의자들을 막는 방패’ ‘인민을 보호하는 고마운 존재’라고 했다.
제대로 정을 나눌 새나 있었나. 황망하게 서독으로 돌아온 주민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서독 우파가 준비한 2라운드가 시작됐다.
‘동독 체제선전의 수단’ ‘분단을 고착시키려는 정치적 이용물’. TV와 신문은 연일 몰아쳤다. ‘히스토리닷컴’은 회상한다. “방문객은 냉전이 얼마나 삶의 내밀한 부분과 인간의 감정까지 관여하는지 뼈저리게 느꼈다”고.
베를린장벽은 미소 냉전시대의 상징이었다. 피와 눈물과 이념을 먹고 자랐다. 월담하던 1000여 명의 동독 주민이 사살됐다. 1989년 장벽의 철거는 냉전 시대의 종말, 즉 소련의 붕괴 이후에야 가능했다.
장벽은 완전히 사라졌을까. 일부 남겼을 뿐 아니라 최근엔 좀 더 확장해 재건했다. 관광코스로 인기란다. 브란덴부르크 문 위의 조각상 니케(빅토리)는 누구를 위한 승리의 여신이었던가. ‘벽 안엔 또 다른 벽(Another brick in the wall·핑크플로이드 곡)’이 있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