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투표는 결코 만능이 아니다.’
1962년 7월 28일자 동아일보 사설 제목이다. 며칠 뒤 박정희 군정(軍政) 당국은 이 사설을 쓴 황산덕(당시 서울대 법과대 교수) 논설위원과 고재욱 주필을 구속했다.
박정희 군정은 ‘개헌의회 구성’이란 헌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제3공화국 헌법(제5차 개정헌법)안을 곧바로 국민투표에 부쳐 확정하려고 했다. 사설은 그 구상을 이렇게 비판했다.
“국민투표를 주장하는 것은 ‘(헌법) 개정 형식’을 밟는 것처럼 가장하고서 신헌법을 ‘제정’해 버리자는 지극히 위험한 사고방식이라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다.”
군정은 이 사설을 자신들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여겼다. 그래서 황 논설위원과 고 주필에게 적용한 혐의는 무시무시한 반공법 위반.
군사쿠데타 세력에 국민투표는 국내외적 논란을 잠재우는 만병통치약 같은 것이었다.
의원내각제를 강력한 대통령 중임제로 바꾸는 문제의 헌법안은 같은 해 12월 17일 투표율 85.3%, 찬성률 78.8%란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12월 26일 헌법 공포식에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겸 대통령권한대행은 당시의 소회를 이렇게 표현했다.
“오늘 헌법 개정의 공포는 5·16혁명에서 시발된 영구혁명의 부단한 이념적 계승을 의미하는 것이다.
앞으로 탄생할 제3공화국의 역사는 제2공화국의 역사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그 차원을 달리하는 이상국가의 역사가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김현철 내각수반은 국민을 향해 “아무리 좋은 헌법도 그것을 수호하고자 하는 국민의 의식이 결여돼 있다면 그 헌법은 한낱 휴지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라고 당부했다.
제3공화국은 몇 년 만에 이런 다짐과 당부를 스스로 저버렸다. 1969년 이른바 ‘3선 개헌’으로 영구 집권의 초석을 놓은 것. 국민투표란 처방전이 다시 사용됐으나 약효는 예전만 못했다. 기권자가 크게 늘어 투표율이 77.1%로 떨어졌고, 찬성률도 65.1%로 낮아졌다.
당시 야당인 신민당의 김영삼 의원은 “반대자와 기권자를 합치면 808만 명으로, 찬성자(755만 명)보다 많다”고 지적했다.
국민투표는 만능도, 만병통치약도 아닐 것이다. 그저 국민의 조용한 외침이라고나 할까. 물론 권력은 그 소리를 듣고 싶은 대로만 들어왔지만….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