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황중환 기자
《지난해 집을 장만한 주부 정모(41·서울 서초구 서초동) 씨. 결혼 13년 만에 서울 강남지역에 입성한 정 씨는 날아갈 듯 기뻤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정 씨는 부부 공동 명의로 아파트를 등기할 생각이었지만 남편이 의외로 반대했기 때문이다. 정 씨는 “이 집은 내 재테크의 공도 크니 공동 명의로 하자”고 제안했다. 남편은 “왜 공동 명의로 등기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내 집이 곧 당신 집인데 혹시 최악의 상황(이혼)에 대비하는 거 아니냐”라고 맞섰다. 며칠간 냉랭해진 부부 관계 끝에 공동 명의 등기에 ‘성공’하긴 했지만 평소 민주적인 가정 운영을 내세우며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해 온 남편이 막상 재산 문제에 대해 보인 사뭇 다른 태도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한국 사회에서 ‘돈’이 화두가 되면서 부부 관계도 ‘돈’에 따라 영향을 받고 변하는 양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혼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한 변호사는 “돈으로 인한 부부 불화는 세대를 초월하는 문제”라며 “특히 은퇴 이후 노부부들에게 돈 문제는 심각한 갈등의 원인이다”라고 말했다.
특히 은퇴 이후 부부는 돈으로 한번 상처를 입으면 다른 세대에 비해 만회할 시간이 많지 않다.
실제 경기 용인시 죽전동 이모(62) 씨는 2년 전 은퇴한 남편과 단둘이 살고 있었다. 경제적으론 여유가 있었고 남들이 보기에 금실도 좋은 부부였다. 이들은 돈 관리 때문에 다투는 일이 잦았다.
이 씨는 여유 자금을 상가에 투자해 투자 차익도 보고 월세도 받고 싶었지만 남편은 돈을 안전하게 은행에 넣어 두고 싶어했다.
이 씨는 “남편이 집에 있으니 생활비가 얼마나 들어가는지도 뻔히 알고 있어 사소한 일에도 간섭하게 된다”면서 “과거에 비해 돈 문제로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고 말했다.
이 씨 부부의 돈 다툼은 약과다. 은퇴 시기에 투자를 잘못했다가 황혼이혼의 위기를 맞은 부부가 적지 않다. 요사이 불어 닥친 부동산 광풍 탓도 크다.
은퇴 후 편안한 노후를 맞이하고 있어야 할 신모(63·서울 성동구 옥수동) 씨. 몇 년 전 남편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감수한 손해를 생각하면 아직도 울화병이 도진다. 6년 전 신 씨 부부는 서울 강남지역의 아파트를 6억 원대에 팔았다.
당시 신 씨는 팔고 싶지 않았지만 남편이 “오를 만큼 올랐으니 팔자”고 고집을 피웠다. 그런데 지금 그 집이 20억 원을 호가한다. 신 씨는 “몇 년 동안 남편을 많이 원망했고 남편도 그 일 때문에 너무 속이 상했는지 생니가 빠질 정도였다”면서 “남편이 안됐기는 했지만 잘못된 판단을 한 남편의 꼴을 지금도 보기 싫다”고 말했다.
부부 사이가 이럴 정도니 친구 등 인간관계도 돈을 따라 움직이는 세태다.
최근 고교 동창생 모임에 참석한 직장인 김모(39·서울 관악구 신림동) 씨는 모임의 최대 화제가 ‘재테크’였다고 말했다. 그는 “고등학교에 다닐 땐 공부도 못하고 그저 그랬던 친구가 이른바 버블 세븐 지역에 아파트를 두 채나 갖고 있었다”며 “돈만 밝힌다고 핀잔을 받았던 그 친구에게 서로 재테크 비결을 듣겠다고 귀를 쫑긋 세우는 친구들 모습을 보고 씁쓸했다”고 전했다.
요즘 사람들은 무엇을 아느냐보다 누구를 아느냐가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고 말한다.
지식의 양보다는 재테크에 필요한 인적 네트워크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돈을 중심으로 한 인적 네트워크를 키워 나가고 중시한다.
3년 전 경기 성남시 분당구 주상복합아파트에 투자해 기대 이상의 수익을 낸 권모(43·서울 송파구 방이동) 씨는 “당시 시세 검증이 안 된 주상복합아파트를 구입한 것은 동네 골프모임에서 만난 재력가의 말 때문이었다”고 했다.
권 씨는 그 재력가가 당시 별 인기가 없었던 큰 평수의 주상복합아파트로 이사하는 것을 보고 ‘아, 저런 사람이 투자하는 걸 보니 적어도 매매가격 아래로는 떨어지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에 과감하게 베팅을 했다는 것.
그는 “돈 있는 사람들을 사귀려고 노력하지는 않지만 인터넷에 있는 온갖 재테크 사이트보다는 주위에 있는 돈 많은 사람의 투자 방법이 진짜 좋은 스승이란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됐다”고 말했다.
옛날에는 ‘가문’을 따졌다면 요즘은 어떤 커뮤니티에 속해 있느냐가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기도 한다.
부유한 사람이 사는 아파트나 동네에 살면 그 사람의 신분도 남에게 달라 보인다.
올봄 서울 강남지역의 고급 아파트로 이사한 이모(38) 씨는 강남 집값이 떨어지지 않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는 주장을 편다. 그는 “강남에 사는 사람은 자식 세대들도 결혼해서 반드시 강남에 살겠다고 한다”면서 “어려서부터 경험한 ‘부 커뮤니티’의 혜택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부나 계층의 세습이 커뮤니티에 따라 달라진다는 속설(俗說)을 믿고, 이 커뮤니티에 집착하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는 것이 요즘 세태다.
박완정 사외기자 tyra2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