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
평범한 40대 초반의 직장인 원 팀장.
지금까지 물려받은 재산 없이 사랑하는 아내, 귀여운 두 자녀와 단란하게 살아왔다.
몇 년 전에 그는 ‘올해의 저축 상’을 받고 신문에 사진도 실렸다.
먹고 싶은 음식, 입고 싶은 옷, 갖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절약하면서, 몇 년 동안 월급의 절반 가까이 꼬박꼬박 저축한 데 따른 보상이었다.
그런 그에게 결혼기념일이나 아내의 생일을 챙겨 외식을 하고 선물을 마련한다는 것은 사치로 느껴졌다. 샐쭉한 아내에게는 “아이들 잘 가르치고 늙어서 잘 살려면 지금은 참아야 해”라며 다독이고 설득해 왔다.
물론 자녀에게 ‘산타’가 되거나 생일 선물을 건넨 적도 없다. 이 모든 건 ‘부자’가 된 미래의 일로 미뤘다.
가족뿐 아니라 자신의 삶도 희생했다. 회비를 아끼기 위해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 모임에도 빠지기 일쑤였다.
“그렇게 해서 언제 집 살래? 돈이 생기면 무조건 저축해야 해.”
직장 동료들에게도 틈만 나면 ‘저축, 저축!’을 외쳤다.
신입사원에겐 “지금부터 월급의 절반을 저축하고, 금융기관을 고를 땐 ○○은행을 고려해보고, 목돈 마련하는 데는 △△상품이 유리한데 검토해 보라”고 조언했다.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그의 말은 설득력을 지녔고, 원 팀장 회사동료들도 이런 영향 때문인지 대부분 저축이 많았다.
주변에선 그에게 ‘저축의 전도사’, ‘개미 형님’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 역시 별명이 싫지 않고 자랑스럽기만 했다.
그러던 지난 연말 송년회 자리.
부서장은 근심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경기가 좋지 않아 내수 시장이 얼어붙었고 올해 회사 매출도 지난해에 비해 30%나 줄어들었어. 더 심각한 문제는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지 않아 앞으로가 더 걱정이라는 점이야.”
회식 자리를 떠나는 직원들도 한마디씩 수군거렸다. “올해 회사 실적이 좋지 않아 연초에 감원이 있을지도 모른다던데.”
“돈 좀 쓰면서 살지. 요즘은 있는 사람들이 더 수전노라니깐.”
뒤돌아 나오는 원 팀장은 왠지 마음이 무거워지면서 한편으로는 의아하게 느껴졌다.
‘돈이 생기면 아끼고 저축하는 게 잘못이란 말인가?’
●이해
‘돈을 써 버릴 것이냐, 내일을 위해 모아둘 것이냐.’
‘햄릿의 갈등’에 버금가는 고민이다.
사람들은 돈을 벌면 원하는 곳에 쓰거나 미래를 위해 저축한다.
사실 내일을 위해 현재의 욕망을 억제하고 절약하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 많다. 원 팀장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개인의 처지에선 허리띠를 졸라매고 저축을 하는 게 부자가 되는 좋은 방법임에 틀림없다. 분명 저축은 권장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저축이 미덕이 아니며, 소비를 하지 않는 인색한 저축 왕을 나무란 사람도 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라는 위대한 경제학자다.
세계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빠진 대공황 당시 그는 “만약 당신이 5실링을 저축하면 한 사람에게서 하루 동안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나나만을 생산하는 작은 섬나라를 상상해 보자. 이 섬나라 사람들이 절약 캠페인을 벌이면 바나나에 대한 수요가 감소해 바나나 가격이 떨어진다. 손실을 입은 바나나 농장주들은 노동자를 해고하고 임금을 줄인다. 섬나라 사람의 소득은 줄고 소비가 더 위축된다. 결국 실업자가 증가해 섬나라 경제는 파탄으로 치닫는다.
이는 케인스가 빈곤의 악순환을 증명하기 위해 제시한 비유다. 여기서는 소비가 분명히 미덕이다.
그렇다면 저축도 소비도 미덕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걸까. 이 말은 모순 같지만 결코 모순이 아니다.
경제 상황에 따라 저축과 소비는 미덕 혹은 악덕이 된다.
저축이 빈곤의 악순환을 부르는 현상은 실업자가 많고 놀고 있는 공장이 많은 불경기에서 생긴다. 저축이 악덕이 되고 소비는 미덕이 되는 시기다. 모든 국민이 저축을 늘리면 불경기가 심각해지고 처음 의도와는 달리 저축이 감소할 수 있다.
반대로 유휴 시설이 적고 공장이나 기계에 대한 투자가 필요한 상황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투자를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이 돈은 저축으로 조성된다. 즉 저축은 투자로 이어지고 국가의 생산능력은 크게 확대된다. 이때 저축은 미덕이다.
따라서 전후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절약해라”, “소비하지 마라”고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써야 할 때나 써야 할 곳에는 과감히 쓰고, 아낄 때나 아낄 곳에서는 알뜰살뜰 절약하는 게 합리적 의사결정이다.
한진수 경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경제학 박사
정리=이나연 기자 laros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