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 역사를 만나다/안광복 지음/205쪽·9800원·웅진지식하우스
요즘 논술과 구술의 최고 화두는 단연 ‘통합’이다. 공통 주제를 추려 개념과 사례를 모으고 문자와 도표, 그림까지 섞어야 한다. 교사부터 학생까지 모두 다 분주하다.
그런데 재료만 섞는다고 저절로 요리가 될까. ‘통합’은 창의성을 평가하기 위해서다. 낱낱의 지식을 버무려 요리를 만들려면 장금이처럼 맛을 그릴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제 ‘스스로’ 터득한 통찰력 없이 통합적 사고는 요원할 뿐이다.
복잡한 세상에서 맥락을 보고, 원리에 다다르려면 두 관문을 거쳐야 한다. 바로 역사와 철학이다. 이 둘은 문제 상황을 헤쳐 갈 아주 든든한 내비게이션이다. 어렵고 따분하다고 외워버릴 수는 없는 일. 마침 고등학교 철학 교사가 길잡이로 나섰다. 재치 있는 문체와 사고법에 웃음 짓다 보면 어느덧 역사에 스며든 철학의 공기를 숨쉬게 될 것이다.
먼저, 역사를 비교하면서 철학의 모습을 되돌아보자. 이 책의 저자는 로마에서 미국을 발견한다. 로마와 미국은 모두 다민족 국가이며 강력한 군사력으로 세계를 제패했다. 그러면서도 각각 그리스와 유럽에 문화적 열등감을 느꼈다. 로마는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을, 미국은 영국의 청교도 사상을 국가 혼(魂)으로 삼았다. ‘신의 섭리에 복종하고 도덕과 명예를 중시하라.’ 지극히 도덕적인 상류문화와 지나치게 풀어진 대중문화, 철학은 두 제국이 이마저도 유사한 이유를 알게 해 준다.
철학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강력한 엔진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인간이 생각한다는 게 그토록 새로웠을까. 그러나 17세기 데카르트가 이성능력을 체계적으로 증명한 덕분에 인간은 신에게서 독립할 수 있었다. 진리의 기준이 성경에서 ‘이성’으로 넘어오고 나서야 과학이 ‘지식’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역사의 눈을 얻으면 철학 명제에도 비로소 윤기가 돈다.
철학은 국가이념으로 정착될 때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중국 한(漢)나라는 유교를, 500년 조선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체제의 근간을 이루었다. 헤겔의 철학은 근대국가를 역사 발전의 최고 단계라 부르며 뒷받침해 주었다. 새로운 사회는 언제나 통치 매뉴얼을 필요로 했고 철학은 역사에 응답하면서 동반자가 되어 온 셈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미덕은 개성 넘치는 표현법에 있다. ‘자유와 평등을 향한 인류의 성인식.’ 신분 차별의 부당성을 맨 처음 알게 해 준 프랑스혁명에 붙인 이름이다. ‘스파르타 팬클럽.’ 아테네의 시민이면서도 민주주의보다는 스파르타의 엘리트주의를 동경했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별칭이다. 간결하게 핵심만 찌르면서도 뒤통수를 치는 맛이 유쾌하다.
‘통합’의 비법은 발효다. 서로 스며들어 곰삭혀진 후에야 깊은 맛이 우러난다. 설익은 암기보다 단 하나라도 차근차근 곱씹는 경험, 아무리 급해도 그것이 가장 소중하다.
권 희 정 상명대 사범대 부속여고 철학·논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