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 자욱한 최루탄 연기가 가실 날이 없던 어느 날 학부 학생들이 연구실에 떼로 몰려왔다. 의자가 모자라 어쩔 줄 몰라 하는데 학생들은 보란 듯이 옆에 있던 신문지를 바닥에 깔고 천연덕스럽게 앉았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시골에서 올라왔다는 학생이 “난 예전에 대학교수가 대단한 존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별것도 아니더라”고 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나도 대학교수야”라고 했다. 학생은 좀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다.
그러던 학생들이 사회인이 되어 찾아와 “선생님은 한번도 ‘운동’이라든가 ‘민중’이라는 말을 한 적도 없는데 왜 우리들이 선생님을 적대시하지 않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고 하면서 “선생님의 휴머니즘이 우리의 운동권 논리보다 컸기 때문인 것 같다”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제 그들은 어른이 됐고 나는 늙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의 이념 과잉 사태는 또다시 나를 우울하게 한다. 진보든 보수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방편 중의 하나일 뿐 그것 자체가 목적일 순 없다. 진보와 보수의 양분법 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는 생각도 아집이자 독선이다. 모든 사람을 두 줄로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좌든 우든 선택하지 않으면 비겁한 사람, 기회주의자로 낙인찍히는 세상이 됐다. 광복 직후의 상황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진보-보수 균형 맞춰야 생존력 자라
진보와 보수라는 좌우 양분법으로만 보더라도 어느 국가 어느 사회든 건전한 진보와 건전한 보수가 균형을 맞춰야 병들지 않고 생존력을 키워 갈 수 있다. 진보의 과격성은 기존가치체계와 국가사회체제를 지키려는 보수의 안정성이 중화제로 작용하여 위험 요소를 덜어 낼 수 있다. 반대로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보수의 정체성(停滯性)을 뛰어넘는 발전의 동력은 진보가 불을 지펴야 가능하다. 그래서 진보와 보수는 상호 보완의 역할을 하게 돼 있다.
우리 사회의 좌우 대립은 이상하게도 외세와 관련된다. 좌파는 북한과, 우파는 일본 및 미국과의 관계를 배제하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겠지만 어쩐지 개운하지 않다. 나라의 내공을 키우는 방법론의 문제 때문에 좌우로 노선이 갈리는 것이 아니라 국제관계 속에서 논란이 되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 세상을 보는 인식의 패러다임까지 서구화하여 대립적 세계관이 보편화됐다. 그럼에도 좌우 극한 대립에 염증을 느끼는 대다수 국민을 의식해서인지 스스로 중도로 자처하는 정치인이 생겨났다. 중도까지도 중도우파니 중도좌파니 하여 또다시 좌우로 줄을 세우려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진정한 중도란 좌우의 중간지점이 아니라 화합의 정신에 입각해야 한다. 중도를 자처하는 이들의 순수성을 재어 보는 척도는 있다. 화이부동(和而不同·화합하되 붙어 다니지 않음)하느냐 아니냐를 보면 된다. 화합하여 이해관계로 패거리를 짓지 않는 것이야말로 화이부동의 정신이다. 패거리를 만든다는 자체가 싸움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므로….
전통시대에 가장 존중된 가치인 화합의 정신은 ‘중용’에 나오는 중화(中和)의 논리에 기초한다. 중화란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균형 감각이며 적중(的中)이 필요조건이다. 어떤 상황에 처하거나 무슨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정확하게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과녁을 딱 맞히듯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적중의 정신이 중화이다. 활을 쏘는 이가 마음을 비우고 고도의 집중을 하지 않으면 적중하기 어렵듯이 중화란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렵다. 그래서 중화의 가치에 입각한 중도의 길은 멀고도 멀다.
진정한 중도는 화합의 정신에 바탕
새해 벽두에 ‘논어’에 나오는 명언-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라(군자는 화합하되 붙어 다니지 않고 소인은 붙어 다니되 화합하지 못한다)-을 떠올리며 모든 사람이 군자가 될 수는 없지만 화합의 정신을 살려 더는 진보냐 보수냐 편 가르고 좌냐 우냐 이상한 줄 세우기 하는 데 국력을 낭비하지 않았으면 하는 희망을 품어 본다.
정옥자 서울대 교수·국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