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살이가 힘들고 암울할 때는 세월이 빨리 가 주기만을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정신적 지주 없이 낙담과 분노 속에 지리멸렬했던 한 해를 그런 마음으로 보냈지만 새해라고 형편이 나아질 전망은 밝지 않아 보인다. 새해 벽두부터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지도자급들이 쏟아 내고, 보여 주는 언행이 미래에 대한 희망의 싹을 잘라 버리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렇게 국가 지도층 인사들한테 기대할 게 없다면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국민이 솔선수범해 먼저 달라지는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 주는 것은 어떨까. 지난 수년간 이 사회에 번진 광기(狂氣)를 청소해 냄으로써 이성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맑은 정신이 이 나라를 이끌도록 하는 데 국민이 앞장서자는 얘기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는 정치인들에게 지나치게 큰 기대를 해 왔고 의존도도 너무 높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정치가 해결해 주기 바라며 살아온 감이 없지 않다는 얘기다. 물론 정치인의 역할이 중요하고, 지도층의 책임이 큰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잘못을 ‘네 탓이오’라고 정치에 돌려놓고는, 마치 그게 시민의 특권인 양 속 편하게 책임감에서 벗어나 있었던 적은 없는지 되돌아볼 필요도 있다.
정치 의존도 너무 높은 것도 문제
예를 들어 러브호텔이 우리 주변에 번성하고 각종 퇴폐업소가 판을 치게 된 현상은 정부와 시민 어느 쪽에 더 큰 책임이 있을까. 전국이 도박 공화국이 됐다고 들끓었지만 과연 정부가 시민의 도덕성을 얼마나 높여 주고 사행심을 어느 정도나 치료해 줄 수 있을까. 성매매에 빠지고 도박에 중독된 국민의 의식 개선 없이 모든 잘못을 정부가 바로잡아 줄 것으로 기대하는 수동적 사고방식 역시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게 많은 것을 정부에 바라다 보니까 정치와 정치인은 우리 국민의 일상에서 지나치게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택시를 타면 운전사에게 정치 강의를 듣게 되고, 저잣거리에서는 상인들에게 경제 정책에 대한 평가를 들어야 한다. 동창회는 지역구 출신 정치인을 성토하는 자리가 되고, 신문 방송은 매일 정치인들의 허튼소리를 토해 낸다. 그렇게 정치에 예민한 우리는 선거 때마다 지도자를 선출하느라 고민하고 갈등도 많이 겪었는데 선거 후 제대로 뽑았다고 만족한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정치가 사회에 차고 넘칠 때 민심은 재주 좋은 정치인들의 선동에 휩쓸려 엉뚱한 결과를 낳곤 했던 것이다. 그러니 뽑아 놓고 미워하게 마련이었다.
정치와 정치인을 너무 미워하는 것도 정신 건강에 좋을 리 없다. 정치인에 대한 혐오증이 이렇게 큰 나라가 또 있을까. 정치인은 하늘에서 떨어진 초인적 존재가 아니다. 정치인들도 바로 국민 속에서 나오는 한 인간일 뿐이다. 국민 역량의 뒷받침 없이 정치 지도자 홀로 이룰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다. 공자 같은 도덕군자가 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모든 사회적 부조리와 불합리가 일시에 해소될 수 없고 제갈공명이 재상으로 기용됐다고 해서 나라가 하루아침에 선진국이 될 리 없다. 위대한 국가는 위대한 국민이 만드는 것이다.
특히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에서 대중의 영향력과 역할은 점점 커 가게 마련이다. 인터넷에는 끊임없이 엄청난 수의 꼬리가 탄생하고 그것들이 여론의 몸통을 휘두르고 있다. 지도자가 따로 없는 가상공간에서 여론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종잡을 수 없고 누구도 통제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한두 사람의 지도층이 아니라 대중에 의해서 사회 풍토가 변하고 문화가 바뀐다. 인터넷 시대에 국민의 의식 수준이 더욱 강조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위대한 국민이 위대한 국가 만들어
이 땅에 링컨이나 간디 같은 위대한 지도자나 천재적인 정치인이 나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어려운 일은 국민의 도덕적 정신적 수준을 전체적으로 높이는 일이다. 서울에 에펠탑보다 높은 타워를 세우거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보다 더 큰 빌딩을 짓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한반도의 전체 땅 높이를 단 한 뼘이라도 높이는 것은 훨씬 힘든 일인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기대는 해 보자. 새해에는 국민이 먼저 변하고 그 의식 수준에 걸맞은 지도자가 선출되는 기적의 시대가 열리기를 소망한다.
이규민 大記者 kyum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