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서울역에서 시민들이 노무현 대통령의 4년 연임제 제안에 대한 대국민 특별담화 방송을 지켜보고 있다. 박영대 기자
■ 4년연임제 쟁점 분석
노무현 대통령이 9일 제안한 ‘대통령 4년 연임제’ 개헌은 여러 측면에서 논란의 소지를 안고 있다. 정치권 관계자와 헌법학자 등 전문가들은 노 대통령의 개헌 논리에 타당한 측면도 있지만, 수긍하기 어려운 대목도 적지 않다고 지적한다.
특별담화에서 노 대통령이 제기한 개헌 논리를 주요 항목별로 분석해 본다.
○ 1987년 체제의 극복을 위해?
노 대통령은 특별담화 모두에서 “올해는 1987년 6월 민주항쟁 20년이 되는 해다. 또 6월 항쟁의 결실로 개정된 현행 헌법이 시행된 지 20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고 했다.
1987년 개헌과정에서 장기 집권을 제도적으로 막기 위해 도입된 대통령 5년 단임제는 이제 민주화가 어느 정도 완성된 만큼 바꿀 때가 됐다는 주장이다.
노 대통령은 “20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우리 헌법은 이제 새로운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규범을 담아야 할 필요가 높아졌지만, 각자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개헌을 주장하다 보면 가치와 이해관계가 충돌해 합의를 이루기 어렵다”며 4년 연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주기를 일치시키는 ‘원 포인트’ 개헌을 제안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1987년 체제의 극복을 말하려면 대선을 11개월 앞둔 시점이 아니라 진작 개헌 문제를 공론에 부쳤어야 했다는 지적이 많다. 노동운동가 출신의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은 “시대변화에 따른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을 필요가 있을 때 개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먼저 대통령 선출 방식만 바꾸고 다음 정부에서 내용을 바꾸는 개헌을 하자는 것은 국력 낭비”라고 비판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여권 주변부에서 1987년 체제 20주년을 명분으로 올해 재집권을 겨냥한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대통령의 개헌론은 그 화룡점정(畵龍點睛)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 5년 단임제는 책임정치 훼손?
노 대통령은 5년 단임제가 책임정치와 국정의 연속성 및 일관성을 훼손한다고 했다. 또 임기 후반에는 대권경쟁이 격화하면서 대통령이 레임덕(임기 말 권력누수 현상)에 빠져 국정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고도 했다.
청와대는 “대통령제를 실시하고 있는 95개국 가운데 단임제를 실시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을 포함한 12개국에 불과하다”며 단임제가 후진적인 모델이라고 강조했다.
동국대 김상겸(헌법학) 교수는 “미국처럼 4년 연임제 하에서는 정책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 특히 대통령과 국회 다수당이 일치되면 대통령이 보다 강력하게 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만약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이 다수당이 된다면 국회와 대통령 간 불협화음이 4년 내내 계속되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치권에선 노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내내 국정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못한 책임을 제도의 문제로 돌리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 대통령과 국회의원 임기는 일치해야 하나
노 대통령의 논리는 대선은 5년, 총선과 지방선거는 4년마다 치르고, 총선과 지방선거도 각기 다른 해에 치르는 바람에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고 적지 않은 사회적 비용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실제 1987년 이후 20년 동안 선거가 없었던 해는 8년에 불과했을 만큼 선거 홍수를 이뤘다.
그러나 대선과 총선 주기를 일치시키면, 대통령 및 정부 여당의 독주 및 이에 대한 견제 기능이 약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실시하면 대통령을 당선시킨 당이 다수당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연세대 박명림(정치학) 교수는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과 의회 지배 정당이 일치하는 ‘단점(單占) 정부’의 경우 의회의 대통령에 대한 견제 기능은 미약할 수 있다”며 “국회의원의 일정한 비율을 임기 중간에 선출하는 등의 중간 평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국의 상원(임기 6년)과 하원(임기 2년) 선거는 대통령의 임기 중간에 실시돼 자연스럽게 대통령에 대한 중간 평가가 이뤄진다.
○ 올해 못하면 20년을 기다려야 한다는데…
노 대통령은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 만료가 2008년에는 3개월로 좁혀져서 정치적 타협이 수월하다는 주장이다. 반면 차기 국회의원은 2012년 5월에, 차기 대통령은 2013년 2월에 임기가 만료되므로 대통령 임기를 1년 가까이 줄이지 않으면 개헌이 불가능하다는 것.
하지만 다음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 만료 시점이 약 9개월 차가 나는 게 문제가 된다면 굳이 현 시점에서 개헌할 필요는 없다. 올해 대선에 출마하는 후보자들이 당선 후 대선과 총선 시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임기를 단축하는 것을 공약하는 방안도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개헌을 안 하면 무조건 20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대선과 총선 시기의 조정 필요성에 관한 국민적 합의가 이뤄진다면 차기 정권에서 충분한 논의와 준비 작업을 거쳐 얼마든지 개헌을 추진할 수 있다. 또 이왕 개헌을 할 바엔 헌법 전반에 걸쳐 보완할 점이 있는지를 면밀히 점검하는 게 옳다.
○ ‘4년 중임제 및 임기 일치’외 다른 이슈는?
노 대통령은 “국민적 합의 수준이 높고, 이해관계가 충돌하지 않는 의제에 집중해야 한다”며 영토조항 등에 대한 개헌은 논란이 많은 만큼 이번에 다루지 않고 철저히 ‘4년 연임제’와 ‘대통령과 국회의원 임기 일치’에만 초점을 맞추겠다고 했다.
그러나 일단 개헌 논의의 물꼬가 트이면 영토조항이나 정·부통령제, 중대선거구제 도입 등 정치 사회적으로 논란이 될 의제로 개헌 논의의 범위가 확대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실제로 열린우리당 민병두 의원은 “1987년 체제는 지역구도의 고착을 낳기도 했다”며 “지역구도 극복을 위해 중대선거구제나 권역별 정당명부제도 함께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단국대 안순철(정치학) 교수는 “현행 헌법의 대통령제 단임제를 바꿀 경우엔 정당 국회 시스템 등도 함께 바꿔야 하는 복잡한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했다.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 연임제
재선에 실패하면 더는 출마 못해
: 중임제
연임 못하더라도언제든 출마가능
노무현 대통령은 9일 개헌을 제안하며 ‘대통령 4년 연임제’란 표현을 썼다.
통상 쓰이는 4년 ‘중임제’란 표현 대신 ‘연임제’라고 한 데 대해 청와대 관계자는 “연임제는 한번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은 이후 한 번밖에 더 출마할 수 없도록 하는 제도로, 중임제와 다르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미국의 4년 중임제는 한번 당선된 대통령이 다음 대선 때 떨어졌을 경우 그 다음에 언제든 다시 대선에 출마할 수 있지만 연임제는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은 더는 대통령에 출마할 수 없는 개념”이라고 부연했다.
이에 대해 어수영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학계에서는 연임제 역시 미국이 채택한 ‘중임제’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며 “연임 횟수를 한 번으로 제한한 상황에서 굳이 다시 출마하는 것까지 막을 필요가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심지연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정치에서 정계 은퇴를 번복하고 한 사람이 대선 때마다 계속 출마하는 등의 관행을 막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면서도 “대통령제를 선택한 선진국들이 대부분 미국과 같은 중임제이기 때문에 앞으로 이 문제는 개헌 논의가 가시화될 경우 또 다른 논란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