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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대 사죄 50년’…‘참회의 연하장’ 하늘에서 부칩니다

입력 | 2007-01-13 02:57:00

일제강점기에 한국 여학생들을 ‘근로정신대’에 보냈던 과거를 참회하는 편지를 보내온 이케다 마사에(오른쪽) 씨가 1994년 일본 오사카의 한 집회에서 홍보물을 배포하는 모습. 사진 제공 아사히신문


“울부짖으며 딸을 찾아 헤매던 부모들,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어린 소녀들의 모습이 내 안에서 점점 커져만 갑니다.”

일본 도야마(富山) 현 도야마 시에 사는 사와다 준조(澤田純三·78) 씨는 해마다 이런 내용이 적힌 연하장 다발을 받아 왔다. 발신인은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이케다 마사에(池田政枝) 씨였다.

여느 연하장과 다른 점은 수신인이 적혀 있지 않다는 점. 그 대신 “아는 사람에게 보내 주세요”라는 부탁이 담긴 편지가 함께 배달됐다. 사와다 씨가 일제의 강제동원 피해를 본 한국인에 대한 보상운동을 펼쳐 왔기에 그에게 발송을 부탁한 것이다.

이케다 씨는 매년 이런 식으로 지인들을 통해 1000∼1500통의 연하장을 발송했다. 될 수 있는 한 많은 일본인이 자신의 고백과 참회를 읽고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패전을 앞둔 일제의 발악이 극으로 치닫던 1944년, 서울 방산초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던 이케다 씨는 ‘여학생들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도야마 군수공장으로 보내라’는 조선총독부의 지시를 받았다.

일제의 ‘황국신민론’에 물들어 있던 그는 다른 일본인 선생들과 함께 밤마다 학생들의 집을 찾아다녔다. “일본에 가면 배부르게 밥을 먹을 수 있고 여학교에도 다닐 수 있다”며 어린 제자들을 꼬드겼다. 당시에는 그도 그 말이 사실이라고 믿었다.

그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초등학생 6명은 이듬해 3월 다른 ‘근로정신대’ 소녀 100여 명과 함께 서울역에서 눈물의 열차에 올랐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고 난 뒤에야 그는 자신이 한 엄청난 일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 알게 됐다. 그는 제자들을 찾아 나섰다.

6명 중 5명이 돌아온 사실은 확인했지만 제자들은 “일본에서 있었던 일은 생각하기도 싫다”며 그를 만나려고 하지도 않았다.

1945년 12월에야 일본으로 귀국한 후 ‘한국 쪽 하늘은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양심의 가책에 괴로워하며 홀로 살아가던 그는 1991년 4월에야 나머지 제자 1명의 행방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

그는 도야마의 한 TV 방송국 기획취재반과 함께 3개월 동안 찾아 헤맨 끝에 한국에서 제자를 만날 수 있었다. 진심으로 사죄하는 그를 제자는 원망하지 않았다. “선생님, 행복하세요?”라고 조용히 물은 게 전부였다.

진정한 사죄의 길을 깨우쳐 준 것은 몇 달 뒤 제자의 딸이 보낸 편지였다. ‘백번 사죄하는 것보다 실천이 중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이 천진난만한 어린 제자들에게 저지른 죄를 널리 알리는 데 발 벗고 나섰다.

‘정신대 동원은 민간업자가 한 일이다’라고 발뺌하는 일본 정부를 향해 그는 “전시에 학생들의 정신대 동원은 거역할 수 없는 ‘천황 폐하’의 명령이었다”고 외쳤다.

‘나쁜 일을 한 채로 죽어서는 안 된다’고 결심한 그는 자신의 반생을 ‘두 개의 조국’이라는 책으로 펴냈고, 여러 강연과 집회에 나가 “일본인이 식민지 조선에 좋은 일을 했다”는 일부 역사학자의 주장이 얼마나 황당한 거짓말인지를 생생한 육성으로 증언했다.

50세까지 교사를 한 덕분에 받은 연금은 최대한 아껴서 강제연행 보상운동을 하는 시민단체에 기부했다. 다른 도시에 증언하러 갈 때는 교통비를 절약하기 위해 항상 야간 버스를 이용했다. 편지 봉투도 광고 전단을 이용해 직접 만들었다.

그의 증언은 정신대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발뺌하던 일본 정부가 사실 인정과 함께 공식 사과를 하게 만드는 큰 계기 중 하나가 됐다. 매년 보낸 참회의 연하장은 심장병과 고령으로 몸이 불편해진 그가 잘못된 과거를 미화하려는 쪽으로 기울어 가는 일본 사회에 던지는 작은 경고음이었다.

매년 이케다 씨의 연하장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 오던 사와다 씨는 최근 지인과의 통화에서 올해부터 연하장이 영영 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케다 씨는 지난해 12월 4일 나라(奈良) 현 이코마(生駒) 시의 자택에서 혼자 쓸쓸히 숨을 거뒀다. 집 앞에 우편물이 쌓이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이웃들이 사망 나흘 뒤에야 그의 마지막 모습을 확인했다. 향년 84세.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일본 사회를 향한 그의 외침은 아직도 긴 여운을 남긴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과거의 일이 아닙니다. 나는 그 (지배의) 일원이었습니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한국의 독립기념관에 가서 피해자들이 쓴 역사를 눈으로 확인하기 바랍니다.”

도쿄=천광암 특파원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