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시대는 헌법학 연구를 활성화할 사례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노 대통령은 탄핵소추로 직무가 정지된 헌정 사상 초유(初有)의 대통령이다.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탄핵 심판과 수도 이전 법률 위헌 결정을 계기로 위상이 한껏 높아졌다. 헌재소장 임명 절차를 둘러싼 위헌 시비로 후보가 교체된 것도 처음 있는 일. 현 집권세력은 헌법재판소 제도 도입 이후 국민적 관심이 쏠리는 위헌 법률을 가장 많이 쏟아 냈다.
현직이 차기 구도 짜 주는 개헌
노 대통령은 헌법학자들에게 새로운 헌법 이론의 원천이 되고 있다. ‘헌법학원론’이라는 역저(力著)를 펴낸 서울대 법대 정종섭 교수는 “헌법은 대통령이 집권을 연장하려 한다는 속성(屬性)을 전제로 임기 관련 규정을 두었으나 중간에 대통령 스스로 ‘못해 먹겠다’고 나오는 사태에 대비한 장치가 마련돼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이 사퇴할 의사가 있더라도 후임자 선출에 걸리는 기간을 고려해 최소한 4개월 전에 의사를 표시하도록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청와대는 ‘노무현 대통령은 개헌이 돼도 출마할 수 없습니다’라는 글에서 현직 대통령이 자신을 위한 임기 연장 또는 중임 변경 개헌을 못 하도록 막고 있는 헌법 조항(128조 2항)을 들어 원 포인트 개헌의 순수성을 설명했다. 이 조항은 1987년 6월 민주항쟁 후 헌법을 개정하면서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연장 개헌을 교훈으로 삼아 만들어진 장치다.
그러나 현직 대통령의 집권 연장 개헌과 마찬가지로, 물러나는 대통령이 후임자의 임기와 중임을 변경하는 구도에도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같은 정치세력의 지속적인 집권을 위해 차기 권력의 구도를 짜 주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대선 정국과 멀리 떨어진 시점이라면 몰라도 대선이 있는 해에 차기 대통령의 임기를 바꾸는 것은 정치세력의 이해관계와 직간접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의 임기 연장 및 중임 변경 조항은 개헌안 발의권자도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되는 것이 타당하다.
1987년 개정 헌법이 대통령 직선제를 선택한 것은 유신체제 이후 5공화국까지 치러진 ‘장충체육관 선거’에 대한 환멸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10% 지지를 받는 대통령이 돌출 언행으로 나라를 흔들어 놓아도 임기 중 책임을 물을 방법이 없는 ‘대통령 무책임 제도’의 폐해를 목도하고 있다. 내각책임제였더라면 국정 최고 책임자가 여러 차례 바뀌었을 판이다. 정정의 불안 없이 국력이 신장하는 일본을 보더라도 내각책임제는 장점이 많다. 언젠가 헌법을 개정할 때는 노 대통령이 실증적으로 제공한 대통령 책임제의 폐해에 대해 진지한 검토를 해 봐야 한다.
헌법포럼(상임대표 이석연 변호사)은 4년 중임의 정부통령 제도를 두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법치(法治)를 강화하는 헌법 개정 시안(試案)을 2005년 말 발표한 바 있다. 헌법포럼은 시안에서 2007년 12월 대통령 국회의원 동시 선거를 제안했다. 이 변호사는 “작년 말까지 개헌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전제로 만든 시안”이라면서 “대선이 치러지는 올해 개헌 카드를 들고 나오는 것은 대선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여유 갖고 멀티 포인트 개헌 필요
언론 자유와 관련한 헌법 조항도 손볼 필요가 있다. 미국 수정헌법 1조는 ‘국회는 언론 자유를 제약하는 어떤 법률도 만들 수 없다’고 못 박고 있다. 노 대통령이 주류 신문을 향해 툭하면 ‘불량상품’ 운운하지만 ‘불량 권력’의 불량한 말투와 신문법 같은 ‘불량 법률’은 언론 자유에 대한 위협이요 대한민국의 국격(國格)을 부끄럽게 한다. 헌법에 정치권력이 자의적으로 언론 자유를 제약하는 법령을 제정할 수 없도록 명문 조항을 두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원 포인트 개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보완하는 멀티 포인트 개헌이 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자면 여유를 갖고 여야 합의와 국민의 너른 공감대 속에 개헌이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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