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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비리그, 험난한 리그]더 좁아지는 바늘구멍

입력 | 2007-01-20 03:01:00

미국 아이비리그 중 하나인 컬럼비아대 도서관 전경. 청운의 꿈을 품고 미국으로 건너온 한국인 학생들에게 아이비리그의 문은 갈수록 비좁은 바늘구멍이 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하버드대 캠퍼스에 있는 설립자 존 하버드의 동상. 동상의 왼발을 만지면 다시 오게 된다(입학)는 속설 때문에 왼발의 색깔이 노랗게 바랬다. 예일대에 있는 시어도어 울시 전 총장의 동상도 마찬가지다. 이들 대학 캠퍼스는 한국 등 아시아에서 방문 관광 상품이 있을 정도로 학부모들이 자녀들을 이끌고 많이 찾는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뭔가 균형 잡힌 인재라는 인상을 심어주지 못한 것이 실패의 원인 같아요.”

한국에서 과학고 1학년 재학 중 미국 사립학교 9학년(한국의 중학교 3학년에 해당)으로 유학 온 K 군은 대학수학능력시험(SAT) 만점을 받고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 지원했으나 떨어졌다.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입상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영재프로그램에도 참여했으며 봉사활동 경력도 많이 쌓은 K 군에게 부족한 점은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MIT가 K 군을 받아주지 않은 주된 이유는 인터뷰 때 미국의 역사와 문화, 시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줬기 때문이란 게 입시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9학년때부터 미국 학교를 다닌 만큼 입학 사정관들은 K 군을 미국 학생으로 간주하고 미국을 이끌어 갈 청년에게 요구되는 높은 문화적 소양을 기대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처럼 갈수록 좁아지고 까다로워지는 아이비리그 진학 문을 뚫기 위해 미국의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추구하는 진로는 영재고교 또는 명문 사립고교 진학이다.

○1차 관문은 영재고교 진학

“아이와 한마음이 돼 뒷바라지한 덕분인 것 같아요.” “학원이나 캠프에도 제대로 못 보내 가슴이 아팠는데 당당히 합격해 얼마나 기뻤는지….”

얼핏 들으면 대학입시 수석 합격자 부모의 소감 같다. 하지만 이는 지난해 가을 워싱턴 인근에서 열린 ‘토머스제퍼슨(TJ)고교 학부모에게 듣는다’라는 세미나에서 나온 경험담이다. 재학생 부모가 자녀를 고교에 합격시키기 위해 어떻게 뒷바라지했는지 경험담을 들려주는 자리인 것이다. 중학생 자녀를 둔 40여 명의 학부모들이 몰려 경청했다.

한인들이 많이 사는 주요 대도시 주변에선 이처럼 영재고 진학 준비를 위한 행사가 자주 열린다. 입시 경쟁이 시작되는 연령도 계속 어려지고 있다. 고교 입시 준비학원들도 성황이다. 버지니아 주 에이플러스학원의 조관식 원장은 “한 학기 등록생이 명문고 입학 준비반을 합쳐 80명 정도인데 한국계가 90%가량”이라고 말했다.

버지니아와 메릴랜드 주에 걸쳐 운영되는 제일학원의 김진화 상담역은 “TJ 입시준비반에 60명가량의 중학생이 다닌다”고 말했다.

한인들만 그런 게 아니다. 유대인 가정에선 시간당 수백 달러짜리 과외가 흔하다. 자녀가 공부를 잘하고 경제적 형편이 되는 백인 가정의 교육열도 더하면 더했지 뒤지지 않는다. 좋은 학군의 공립고교가 있는 지역은 주택경기 불황 속에서도 집값이 떨어질 줄 모른다.

○영재들에게도 좁은 아이비리그의 문

그러나 명문고 입학이 아이비리그 진학의 보증수표는 아니다. TJ고는 SAT 평균성적이 미국에서 가장 높은 독보적인 영재학교. 입학정원은 500명가량인데 지난해 경쟁률은 5.47 대 1이었다. 지원자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영재교육 코스를 밟아 온 GT(Gifted and Talented)센터 출신들이 많으며 일반 중학교에선 대부분 상위권 2∼3% 이내 학생들이다.

이렇게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 “TJ의 11학년들은 매일 전쟁을 치르듯 살고 있다”(워싱턴포스트 보도)는 평이 나올 만큼 많은 공부와 특별활동을 한다. 학생들은 매일 오전 2, 3시까지 공부해야 할 만큼 과제량이 많고 어렵다고 토로한다. 숙제를 못 해 아프다는 이유로 결석하는 학생도 많다. 아파서 결석하는 것은 인정되지만 숙제를 안 해 오면 학점에 치명적이기 때문.

하지만 TJ에서도 아이비리그 진학은 상위권 20%가량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이다(표 참조). 지난해 TJ의 명문대 합격생 중 한인학생은 하버드 2명, 프린스턴 1명, 스탠퍼드 1명, MIT 2명이었다.

뉴저지 주의 버겐아카데미도 과학·수학 영재학교. 뉴스위크가 매년 미국 베스트 공립학교를 발표할 때 ‘다른 학교에 비해 탁월하게 우수해서 별도 순위를 매기지 않는’ 22개 최고 공립학교에 포함된다.

이 학교 11학년(한국의 고교 2학년)에 다니는 박상현 군은 지난해 본 SAT에서 2400점 만점, 진학적성예비시험(PSAT)과 ACT(American College Test)에서도 만점을 맞았다. 그러나 박 군의 어머니인 채미영 씨는 “전부 만점을 맞아도 아이비리그 합격을 장담 못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해 말 주요 대학 조기전형발표 때 이 고교에서 하버드대는 1명, 예일대는 2명, 프린스턴대는 1명 합격하는 데 그쳤다. 하버드대 합격자는 SAT, PSAT 만점은 물론이고 글도 아주 잘 쓰는 학생이었다. MIT가 전 세계 수학영재 50명을 뽑아 운영하는 프로그램에 참가했을 정도로 수학성적이 뛰어났던 한 학생도 MIT 조기전형에서 떨어졌다. 정규전형에서는 합격자가 더 나오겠지만 최우수 학교에서도 아이비리그 조기전형 합격은 쉽지 않다.

채 씨는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대 등 이른바 ‘빅3’ 아이비리그는 공부만 잘해선 안 되고 하늘이 도와야 입학이 가능하다”며 한숨을 쉬었다.

박 군도 현재 수업공부 외에도 모의유엔, 수학팀, 바이올린, 컬럼비아대 과학우수자 프로그램, 테니스, 자원봉사, 과학올림피아드 등 과외활동을 10개 넘게 한다. 공부는 공부대로 하고 이처럼 다양한 활동을 해야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기 때문.

일반 공립고교의 경우엔 한 해에 아이비리그 전체를 통틀어 1, 2명이 들어가면 ‘농사를 잘 지었다’는 평이 나온다. 매클린처럼 교육열이 높은 학군의 학교들은 그보다 몇 명 더 많이 들어가지만 그야말로 톱클래스에게만 가능한 얘기다.

올해 매클린 고교가 4년 만에 배출한 하버드대 합격생인 정은지 양은 고교 내내 올 스트레이트 A학점(Weighted 4.1), AP(대학 과목 사전 이수제도)과목 11개 이수, SAT 2360점으로 어려서부터 단 한 번도 톱을 놓쳐 보지 않은 최우등생이다. 정 양의 아버지 정모 씨는 “미국에서의 대학입시는 성적만으론 되지 않고 요구되는 자질이 너무 많아 힘들었던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더 불리해진 한국 유학생들

한 교육전문가는 “아이비리그 입학 기회 중 일부는 부유층 기부입학과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예일대 입학이 보여 주듯이 명문가 출신 동창생 자녀들에게 할당된다”고 말했다. 또 한 해 학비가 4만∼5만 달러에 달하는 보스턴 등 동부의 명문 기숙학교들도 많은 합격자를 배출한다고 한다. 실제로 명문사립인 필립스아카데미는 400명의 졸업생 중 70명가량이 아이비리그에 진학한다. 이 같은 명문 기숙학교는 학비도 학비지만 입학 경쟁도 영재고 못잖게 치열하고 점수가 높다.

인종적으론 흑인 히스패닉이 상대적으로 배려된다. 이런 이유로 미국 내 일반 고교 출신의 한국 중국 등 아시아계 학생들은 그 학교 내에서 특출한 면모를 보여 주지 않는 한 입학사정에서 불리하다는 게 교육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이 때문에 아예 “외국 고교 출신으로 지원하는 게 낫다”며 한국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나오고 있다. 현 정부 고위공직자인 A 씨의 딸은 TJ를 다니다 민족사관고에 진학해서 컬럼비아대에 합격했다.

:아이비리그:

미국 동부 지역에 있는 8개 명문 사립대를 일컫는 말. 브라운 컬럼비아 코넬 다트머스 하버드 펜실베이니아 프린스턴 예일 대학에 담쟁이덩굴(ivy)로 덮인 건물이 많은 데서 생긴 별명이다. 이 대학들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 최고 수준의 명문으로 꼽힌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뉴욕=공종식 특파원 k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