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월 20일 오전 6시 영국 런던의 주택가.
새벽의 정적을 깨고 현관 벨이 울린다. 막 잠에서 깨 눈을 제대로 못 뜨고 문을 연 사내. 어둠이 내려앉은 아침 안개 속에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을 훌리건 주동자로 체포합니다.”
경찰의 체포 작전은 놀라웠다. 6시 정각 서른 곳을 동시에 급습했다. 26명이 연행되고 7명은 즉각 기소됐다. 현장에선 마피아 못지않은 무기들이 발견됐다. 공기총과 징 박은 체인, 대형 장검까지 나왔다.
사전 준비도 철저했다. 5개월간의 비밀수사. 사복 경찰들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폐쇄회로TV와 헬리콥터를 이용해 증거를 모았다. 런던 경찰이 축구장 현장 체포가 아닌 훌리건 혐의로 축구팬을 검거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훌리건(Hooligan).
원래는 불량배나 부랑아를 뜻하는 말이다. 1898년부터 언론에 등장했다. 종주국답게 누구나 축구를 사랑한 영국. 할 일 없는 동네 건달이 축구장에 모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축구장 난동꾼들을 훌리건이라 불렀다.
훌리건이 시정잡배 수준을 넘어선 건 1960년대부터. 1963년 당시 최고의 팀이던 리버풀FC 응원단 ‘더 콥(The Kop)’은 조직화된 훌리건의 효시였다. 이후 ‘헤드헌터스’ ‘인터 시티 펌’ 등 슈퍼 훌리건 집단이 등장했다. 축구장 난동이나 패싸움은 일상적인 일이 됐다.
축구를 향한 맹목적인 열광은 결국 피를 불렀다. 1985년 벨기에의 헤이젤 스타디움. 리버풀 대 유벤투스의 유럽 챔피언스컵 결승전에서 훌리건 난동으로 39명이 사망했다. 1989년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의 FA컵 준결승전에선 스탠드까지 무너지며 95명이 죽었다. 지금도 회자되는 ‘헤이젤 참사’와 ‘힐스버러의 비극’이다.
훌리건 확산엔 영국 정부의 탓도 컸다. 사회복지 축소와 빈부격차 심화로 쌓인 실업자와 빈민층의 울분은 축구장에서 폭발했다. 이해득실 때문에 은근히 이를 방치한 정부도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다수임을 믿고 무차별 폭력을 행사한 훌리건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익명성에 숨어 다른 편에게 무자비하고 가혹했던 그들. 열정이 아닌 광란에 휩싸여 사이버 테러를 가하는 한국 연예인 팬클럽에서 훌리건의 그림자를 느끼는 건 억지일까.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