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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비리그,험난한 리그]대학 진학해도 ‘산 넘어 산’

입력 | 2007-01-23 02:53:00

그 어렵다는 관문을 뚫고 아이비리그에 입학했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재학 중 언어 장벽과 엄청난 학습량에 시달려야 함은 물론이고 졸업 이후에도 각종 난관은 끝이 없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미국에서 일할 수 있는 체류 신분에는 문제가 없나요?”

“귀사에서 취업비자(H-1B) 발급을 지원해 주시기를 원합니다만….”

“비자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오세요. 그러면 기꺼이 당신을 채용하겠습니다.”

미국 퍼듀대를 거쳐 조지워싱턴대에서 경영학 석사(MBA) 학위를 받은 류모 씨는 최근 조지타운대 대학원에 다시 진학했다. 취업을 일단 포기하고 브랜드마케팅을 공부하기 위해서다. “취업 인터뷰는 대개 4, 5차까지 이어집니다. 언어의 장벽을 겨우 뚫고 나갔지요. 그런데 마지막 관문에서 비자문제에 걸리더군요.” 바늘구멍을 뚫고 미국 명문대에 입성한 한국 학생들. 그들은 보람 속에서도 엄청난 학업량에 이어 졸업 후 취업비자 문제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는다. 》

○발 묶는 취업비자

컬럼비아대 대학원에서 통계학을 공부하는 배종완(24) 씨는 “아이비리그생의 경우 좋은 직장에서 취업 제안이 많이 들어오는 것이 사실이지만 막상 누구나 선망하는 직장에 들어가고자 하면 비자문제에 걸려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코넬대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의 부모는 아들이 좋은 직장을 구하는 데 비자 문제가 걸림돌이라는 얘기를 듣고 농업이민 절차를 밟는 중이다. 저개발 지역에 30만 달러 안팎을 투자하면 영주권이 빨리 나온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의 한 대학을 졸업한 최모(여) 씨는 취업 비자를 지원해 주는 한국계 기업의 미국 법인에 취업했다. 보수는 적고 일은 고되지만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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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업이나 진학 모색

메릴랜드대를 졸업한 김모(여) 씨는 취업에 매달리지 않고 워싱턴에 꽃가게를 차렸다. 휴대전화 대리점이나 학원을 차려 자기 사업을 시작하는 명문대 졸업생들도 있다.

월가 진출, 로스쿨 진학과 더불어 아이비리그 재학생들이 많이 희망하는 진로는 의과대학원 진학이다. 그러나 미국인도 재수, 삼수, 박사 출신 지원생이 수두룩하며 경쟁률이 100 대 1 이상인 경우도 있다.

의과대학원 진학 예비과정인 프리메드(premed) 코스를 밟는 예일대 3학년 유길상(21) 씨는 “수업시간을 빼고 개인적으로 혼자서 공부해야 하는 분량이 하루 평균 6, 7시간에 이른다. 더군다나 예일대 프리메드를 졸업한다고 해서 의과대학원 합격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라고 전했다.

한 명문대 대학원 졸업생은 “많은 학생이 미국에서 경력을 쌓아 졸업장과 이력서를 함께 갖고 한국에 가면 높은 연봉의 자리(간부직)로 진입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만 한국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친구가 D기업 창업자 친척인데 그분이 ‘한국에도 똑똑한 SKY(서울·고려·연세대) 출신이 많은데 왜 나이 들고 한국 물정에도 어두운 너희를 비싼 연봉 주고 쓰겠느냐’고 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다들 씁쓸했지요.”

○언어 장벽과 살인적인 학업량

아이비리그 학생들은 흔히 “‘고교를 한국에서 다니고 대학은 미국에서 다니면 그게 가장 불운한 조합”이라는 농담을 한다. ‘4당 5락’과 엄청난 사교육에 짓눌린 채 고교시절을 보낸 뒤 막상 대학에서 해방감을 만끽하려니 미국 대학은 그야말로 ‘공부하기 위해 모인 곳’이더라는 뜻이다.

사립고교인 필립스아카데미를 거쳐 2004년 컬럼비아대에 진학한 박지성(경제·정치학) 씨는 “한국에서 곧바로 학부과정으로 온 친구들은 영어문제도 컸지만, (미국 학생과 달리) AP(대학 학과목을 고교 때 수강하는 선행학습)학점이 없는 탓에 4년 만에 졸업하기가 빠듯한 친구를 자주 봤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다들 독하게 공부하니까 낙제점(fail)을 받는 친구는 못 봤다”고 말했다.

명문 주립대인 버지니아대에서 컴퓨터과학을 전공하는 최모 군은 아예 2년간 머리를 빡빡 깎고 다녔다. “잠깐 한눈팔면 눈 덩이처럼 공부할 게 밀리고 도저히 따라갈 수 없게 돼 머리 다듬는 데 신경 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고 설명한다.

프린스턴대를 졸업한 뒤 생물학 연구소에 근무하며 의과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는 브라이언 조 씨는 “워낙 수재들이 경쟁하는 곳이라 좋은 학점을 받기가 참 어렵다”고 말했다.

컬럼비아대 수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인 이택규 씨는 “수학 물리 숙제가 매주 나오고 영어 작문 철학은 읽을 게 너무 많아서 고민”이라며 “학기 초를 제외하고는 마음 편하게 쉬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한국 고교를 졸업한 학생들의 경우엔 AP학점이 없어서 8학기 만의 졸업이 결코 쉬운 목표가 아니다. 6년 이상 학부를 다니는 학생도 있다.

2004년 미국 명문 10개 대학에 합격해 화제를 불러 모았던 하버드대의 박원희 씨는 최근 한 초청 세미나에서 “민족사관고 시절 너무 힘들어서 많이 울었는데 그래도 그때 혹독하게 공부하는 훈련을 한 게 대학생활을 버티는 힘이 된다”고 말했다. 그가 중도에 학업을 포기했다는 악성 루머도 돌았지만 박 씨는 하버드대에서 우수한 학생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경제학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에이플러스 학원의 조관식 원장은 “중고교 시절 어떻게 공부하는 훈련을 쌓느냐가 대학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대학 내에서 보이지 않는 배타적 장벽을 느끼는 학생들도 있다. 코넬대를 졸업한 레이철 던세모아(여·25·존스홉킨스대학원) 씨는 “상류층 집안 아이들이 주로 속한 클럽들이 배타적 집단을 만들어 소수인종, 여성, 중부의 시골 출신은 그런 클럽에 끼기 어렵다”고 말했다.

물론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아이비리그 생활이 주는 성취감은 크다고 재학생들은 입을 모은다. 예일대의 유길상 씨는 “친구들과의 토론이나 특별활동처럼 ‘강의실 밖’에서 배우는 것이 매우 많다”고 말했다.

“시험 때가 아닌데도 새벽 3, 4시까지 빈자리가 없는 도서관에 앉아 있노라면 압박감을 많이 느낍니다. 밤에 지쳐서 도서관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는데 한국인 친구가 복숭아 한 개를 구해 왔어요. 한입 가득 나눠 무는 순간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컬럼비아대 배종완 씨)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뉴욕=공종식 특파원 kong@donga.com

이 기사의 기획 및 취재에는 지난해 미국 아메리칸대(영상미디어학과) 및 숙명여대(정보방송학과)를 졸업한 김보미 씨가 참여했습니다.

■ 한미FTA 체결되면

전문직 취업비자 쿼터 늘어날 듯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의 쟁점 중 하나가 ‘전문직 취업비자 쿼터’ 할당 문제다. 미국에서 전문직종을 구하는 외국인이 H-1B 비자를 받으려면 고용주가 ‘내국인 가운데서는 이 분야의 전문성을 가진 사람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게다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쿼터가 6만5000개에 불과하다.

그러나 미국은 FTA 체결 국가에 별도의 쿼터를 주기도 한다. 싱가포르는 5400개를 받았고 호주는 FTA 체결 후 별도 입법으로 더 조건이 좋은 E3 비자 1만500개를 받았다. 한국 정부는 최소한 호주보다는 많은 쿼터를 요구할 방침이다.

미국 측은 비자문제는 의회 입법사항이기 때문에 FTA와 별도로 논의해야 한다고 본다. 협상이 타결되면 코리안 아이비리거들이 미국에서 ‘고급 직장’을 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