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중고교 때 외국에 잠깐 유학을 다녀온 뒤 국내 특수목적고나 대학에 진학하는 쪽으로 조기 유학 경향이 바뀌고 있다. 22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세한아카데미에서 방학 때 일시 귀국한 조기 유학생들이 국내 대학 입학을 위한 강좌를 듣고 있다. 박영대 기자
《서울 강남지역 고교에서 1, 2등을 했던 조모(23·연세대 1학년) 씨는 고교 1학년 말 ‘7막 7장’이란 유학 성공기를 읽고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그는 2001년 9월 미국 미시간 주의 명문 사립학교인 크랜브룩고교에 편입했다. 미국 대학수학능력시험(SAT)에서 1600점 만점에 1510점을 받고 상위권 MBA스쿨인 뉴욕대 스턴 스쿨의 학부과정에 입학했지만 한 학기만을 마치고 휴학했다. 연간 4500만 원이 넘는 학비 부담과 졸업 후 불확실한 진로 등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
조 씨는 “어릴 적 무턱대고 충동적으로 떠난 것이 후회스럽다”면서 “조기 유학 때문에 오히려 친구들보다 4년이나 뒤진 셈이 됐다”고 말했다.
조기 유학의 유형이 바뀌고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외국 초중고교로 유학을 떠나 현지에서 명문대를 졸업하고 진로를 모색하는 것이 주류를 이뤘다. 최근에는 외국 초중고교에서 1∼3년 조기 유학하면서 원어민 못지않은 어학 실력을 쌓은 뒤 국내 외국어고 등 특수목적고와 명문대에 진학하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현지에서 조기 유학 선배들이 외국 대학을 나와도 비자나 인종차별 등의 문제로 번듯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모습을 본 조기 유학생들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더욱이 국내에서마저 취업할 때 우대받지 못한다는 인식과 비싼 학비를 들여 가며 고생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도 변화의 원인이다.
○잠깐 유학 뒤 국내 대학 진학
2006학년도에 신설된 연세대 ‘언더우드 국제대학(UIC)’ 수시모집 전형에는 58명 모집에 해외 고교 출신 학생 189명이 지원했다. 합격생 18명 가운데 15명은 미시간대, 위스콘신대 등 미국 유명 대학에도 합격했지만 주저하지 않고 UIC를 선택했다.
UIC는 해외 고교 출신자의 지원이 예상외로 많자 2007학년도에는 정원을 85명으로 늘렸다. 이번엔 해외 고교 출신 296명이 지원해 35명이 합격했다. 모종린 국제대학장은 “24명은 코넬대, 컬럼비아대, 다트머스대, 듀크대,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등 미국 명문대에 동시 합격한 학생이었다”고 말했다.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 등이 ‘글로벌 전형’ ‘국제학부’ 등 영어 실력이 뛰어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전형을 늘리면서 국내 대학이 조기 유학생들의 ‘역(逆)유학’ 기착지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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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국제학부는 모든 강의를 영어로 진행해 입학생들이 영어 실력을 활용할 수 있을뿐더러 생활비와 학비 부담을 줄이면서 미국 대학의 커리큘럼과 수업 방식에 맞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재학생들은 국내에서 다양한 인맥을 쌓을 수 있고 국내 취업이나 해외 대학원 진학 때 선택 기회가 많은 것도 매력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UIC에 다니는 김용휘(19) 씨는 “미국 사립고를 졸업한 뒤 코넬대 입학을 포기하고 UIC에 진학했다”며 “국내에서 인맥을 쌓은 뒤 미국 대학원에 진학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외국 대학을 다니다 국내 대학에 편입하는 학생도 늘고 있다.
이화여대는 이달 실시한 편입학 전형(모집 정원 300명) 지원자의 면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외국 대학 재학생이 61명이나 됐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부분 코넬대, 퍼듀대, 존스홉킨스대 등 미국 유명 대학과 베이징(北京)대, 칭화(淸華)대 등 중국 유명 대학 유학생들이었다.
이화여대 황규호 입학처장은 “국내 대학의 수준이 높아지고 국제학부 등 외국 교육과정과 비슷한 학과가 개설되면서 조기 유학생이 많이 지원하고 있다”며 “외국 대학 졸업장이 한국 사회에서 경쟁력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어서 이런 추세가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목고 지원 징검다리로 활용
초중학교 때 잠깐 조기 유학한 뒤 특성화중학교나 외고 과학고 등 특목고에 지원하는 학생도 늘고 있다.
조기 유학생은 외국에서 SAT와 에세이를 혼자 준비하기는 힘들고 외국의 우수 학생과 경쟁해서 좋은 대학에 추천받기도 쉽지 않다. 때문에 한국 특목고에서 공부해 외국인을 위한 전형을 통해 외국 유명 대학에 진학하는 게 더 유리할 수도 있다.
2007학년도 청심국제중 신입생 가운데 1년 이상 해외 유학 경험이 있는 학생은 40%로 지난해보다 10%포인트 늘어났다. 청심국제고도 41%에서 51%로 늘었다. 서울 대원외고의 경우 2006학년도 신입생 가운데 1년 이상 해외 경험이 있는 학생은 24%로 전년도(22.8%)보다 약간 늘었다.
대원외고 김창호 입학관리부장은 “해외 귀국자 특례 입학에 지원하는 학생이 70∼80명으로 해마다 늘고 있다”고 말했다.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이 기사의 취재에는 본보 대학생 인턴기자 지형철(고려대 사회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방학이용 잠시 귀국 ‘입시 과외’
조기유학생 많은 美-호주 지역
한국인 운영 보습학원도 성업 ▼
22일 오전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해외 귀국학생 전문학원인 ‘세한 아카데미’는 학생들로 북적였다. 학원생이 200명을 넘는다.
이들은 대부분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지에서 중고교를 다니는 조기 유학생들이다. 겨울방학 기간에 일시 귀국해 토플, SAT, AP(대학 과목 사전 이수제도) 준비 등의 강좌를 듣고 있다. 2, 3개 강좌 수강에 수강료가 월 100만 원을 넘는다.
이들 중 상당수는 외국에서 고교를 졸업한 뒤 국내 유명 사립대의 국제학부 진학을 목표로 한다. 이 때문에 방학 때마다 귀국해 학원을 다니며 국내 대학 입시를 준비한다.
신모(18·뉴질랜드) 양은 “이민을 가지 않는 이상 유학생들은 대부분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어 한다”면서 “한국에서 취업하려면 외국 대학보다는 국내 명문대에 다니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신 양은 연세대 언더우드 국제학부 입학을 목표로 토플과 AP 수업을 듣고 있다.
이 학원뿐만 아니다. SAT 전문 학원이나 토플 학원에도 ‘도로 한국행’을 꿈꾸는 조기유학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해커스학원 관계자는 “인터넷을 통한 동영상 강의를 얼마 전에 시작했는데 예상외로 해외에서 접속하는 수강생의 비중이 높았다”며 “이들 중 상당수가 조기 유학을 간 중고교생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일단 유학길에 올랐다가 국내 중고교나 대학으로 돌아오려는 조기 유학생이 늘어나자 외국에서 국내 대학 입시를 목표로 한 과외도 늘고 있다.
3년 전 뉴질랜드로 혼자 조기 유학을 떠난 박모(13) 군은 한국 고교로 돌아오기 위해 현지에서 한국 수학 교과서를 놓고 과외를 받고 있다. 과외 교사 역시 조기 유학 자녀 때문에 휴직하고 온 한국의 중학교 수학 교사다. 1시간에 50뉴질랜드달러(약 3만 원)를 주는데 현지 물가를 감안하면 비싼 편이라는 것.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조기 유학생이 많은 곳에선 한국인이 운영하는 보습학원도 성업 중이다. 또 국내 학원들이 조기 유학생의 숙식과 학습까지 책임지는 ‘관리형 유학’ 프로그램도 인기가 있다.
이들 학원은 처음에는 유학생의 현지 적응을 돕기 위해 대부분 강의를 영어로 했으나 최근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학생이 늘면서 한국어 강의 비중을 부쩍 늘리고 있다.
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