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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알프스 雪國의 계곡은 니체처럼 깊고 가팔랐다

입력 | 2007-01-27 03:11:00

샴페인에 비유되는 스위스 생모리츠의 푸른 하늘, 장쾌한 스윙으로 튀어오른 눈 조각들이 빚는 정경이 눈부시다. ‘생모리츠 스노골프 챔피언십’에 출전한 영국의 슈퍼모델 조디 키드가 눈밭 러프에서 샷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 시바스 브라더스


■ 스위스 생모리츠, 겨울스포츠의 천국으로

《금요일 오후, 알프스 기슭의 작은 도시 생모리츠는 술렁거린다.

오후 4시가 조금 넘어서면 스위스 동남부의 해발 1856m 고산지대에 석양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3300m가 넘는 코르바치 산악의 수많은 스키장 중 하나의 슬로프에 횃불이 밝혀진다.

생모리츠에서 빙하 계곡(엥가딘 계곡) 건너편으로 보이는 그 횃불들이 선명해지면 사람들은 형형색색의 스키와 스노보드를 들고 시내의 버스정류장에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들뜬 기분을 달랜다.

오후 7시. 깊은 어둠이 내릴 무렵 산악열차를 이용해 정상에 오르면 한바탕 축제판이다.

레스토랑에선 댄스음악이 쏟아져 나오고,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스노보드장에선 온갖 묘기가 펼쳐져 구경꾼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출발선에 서면 깎아지른 듯한 슬로프가 양옆으로 밝혀진 횃불을 반사하며 빛난다.

경사도에 비해 안전시설은 허술한 편이다. 외국에서 온 낯선 스키어들은 긴장하지만 토박이 10대 보더들은 신이 난 듯 손뼉을 마주치고 선뜻 슬로프로 들어선다. 초고속 활강.

기자도 천천히 활강을 시작했다.

조금씩 속도가 붙으면서 스키 뒤로 파우더스노가 흩어졌다.

바닥으로 느껴지는 포근한 눈의 감촉이 편안했다.》

만년설이 부드럽게 느껴진다. 그것도 잠시. 가파른 절벽을 끼고 도는 커브가 연이어 나타나면서 공포감이 엄습하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국내의 스키장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스릴이다. 39스위스프랑(약 3만 원)짜리 극한체험이었다.

○겨울스포츠의 천국 생모리츠

알프스의 남쪽 자락, 이탈리아와 붙어있는 지역에 있는 엥가딘 계곡은 억겁에 걸친 세월의 흔적이다. 빙하가 흘러내리면서 V자 계곡이 아니라 바닥이 넓적한 U자형 계곡을 만들면서 양쪽 기슭으로 거칠지만 아름다운 구릉을 만들었다. 바닥에는 3개의 커다란 호수(생모리츠, 실바플라나, 실스 호수)와 그 사이사이 벌판이 형성됐다. 중심도시는 생모리츠. 3000∼4000m 높이의 20여개 산에 둘러싸여 있다.

생모리츠 뒤쪽으로 펼쳐진 코르빌리아와 맞은 편의 코르바치 산자락에서 즐길 수 있는 스키와 각종 썰매는 이곳이 최고의 겨울 리조트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 두 곳만 해도 슬로프 총 길이 150km에 곤돌라 리프트가 48개에 이른다.

그렇지만 훨씬 다양한 아웃도어 라이프가 가능한 것은 계곡 바닥의 벌판과 호수 덕분이다. 생모리츠 호수는 폭 500m, 길이 1500m, 수심 40m에 이른다. 폴로는 유럽의 상류층이 선호하는 대표적인 스포츠. 생모리츠 사람들은 벌판의 눈밭에서 폴로를 즐긴다. 말과 눈밭이 펼치는 묘한 조화는 화이트 터프라고 불리는 경마대회에서도 느낄 수 있다. 눈을 활용한 레포츠는 폴로 외에도 많이 있다. 여섯 마리 혹은 더 많은 개들이 끄는 개썰매, 이동수단으로도 활용되는 크로스컨트리, 아이스 스케이트, 봅슬레이, 컬링, 아이스하키….

생모리츠 시내를 중심으로 곳곳에 자리 잡은 수십 개의 고급 호텔과 다양한 겨울스포츠의 전통은 이곳이 두 차례(1928, 1948년)나 동계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었던 이유를 쉽게 짐작하게 한다.

○눈 위의 환상체험, 스노골프

겨울 스포츠의 천국 엥가딘 계곡을 더욱 특이하고 재미있게 만드는 양념은 스노골프. 계곡 바닥에 펼쳐진 눈밭을 다져 9홀의 골프장을 만들고 그 위에서 골프를 즐기는 게임이다. 적당히 눈을 다져 미끄럽지 않되 발이나 공이 빠지지 않는 페어웨이와 얼음 수준으로 굳게 만든 ‘화이트’라 불리는 ‘그린’, 무릎 깊이로 내버려둔 눈밭 러프로 이뤄져 있다. 홀마다 파에 필요한 타수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총타수를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다. 풀밭 골프에서 골퍼가 갖고 있는 핸디캡을 적용해 적절히 가감하면 승패를 가릴 수 있다. 눈 위의 골프장이라 코스가 길지 않아 남자는 우드(드라이버 포함)를 사용할 수 없다. 약 95∼250m 거리의 홀로 구성돼 있다.

하얗게 펼쳐진 골프코스. 티잉 그라운드(물론 여기도 눈밭)에서 고무로 만든 티에 형광골프공을 올려놓고 마음을 가다듬지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가 쉽지 않다. 집중, 또 집중. 클럽을 휘둘러 공을 치지만 날아가는 공보다는 튀어오르며 흩어지는 눈이 만들어내는 그림에 더 눈길을 빼앗긴다.

조금만 욕심내면 눈밭으로 공이 사라지거나 튕겨져 오르기 십상. 자세가 흐트러져 넘어지기도 쉽다. 9개의 홀을 다 도는 데 2시간 남짓밖에 걸리지 않지만 미끄러운 곳에서 다리에 힘을 주고 샷을 하거나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온몸이 뻑적지근할 만큼 힘겨운 운동이다. 고대 로마 때부터 사용했다는 유명한 광천수의 스파에서 스노골프로 언 몸을 녹이는 즐거움은 망외의 소득.

○시바스 라이프, 스노골프 챔피언십

1월 12, 13일 이곳 엥가딘 계곡에서 열린 스노골프 챔피언십은 28년 역사의 전통 있는 스포츠 이벤트. 세계적인 위스키 시바스 리갈이 2005년부터 소비자, 전문가들과 함께하는 ‘시바스 라이프’(www.chivaslifeseries.com)의 일환으로 진행하고 있다. ‘특이한 장소에서 도전정신을 불러일으키는 일련의 이벤트’가 캐치프레이즈다.

프로골퍼, 남녀 핸디캡(아마추어), 시니어, 주니어 부문으로 나눠 치른 올해 대회에는 18개국에서 온 110여 명이 참가했다. 고지대의 추운 날씨 속에서 치러지는 대회여서 아무리 프로선수라고 해도 의외의 결과가 빚어지기 일쑤.

“스코틀랜드의 서리 내린 골프장에서 치는 느낌과 비슷하다”고 스노골프를 평한 유럽 시니어투어 프로골퍼 샘 토런스는 “하지만 그와 다른 흥미진진함과 특이함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시타를 하고 여성부 시합에도 참여한 영국의 슈퍼모델 조디 키드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이 이 게임을 더욱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게 만든다”며 “이 점이 바로 내가 스노골프를 사랑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이곳에선 스윙의 원칙보다는 마음을 여는 것이 중요하다는 ‘본능골프’(instinctive golf)를 강조한다. 칠레의 스노골프 대회, 네팔의 코끼리폴로 경기도 시바스 라이프 행사의 시리즈다.

○모든 것을 떠나 쉬고 싶다면…

3개의 아름다운 호수 중 하나인 실스. 1879년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병든 몸을 이끌고 실스 호반의 작은 마을 실스마리아를 찾는다. 바젤대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엥가딘 계곡에 온 니체는 “나는 지금 마치 약속의 땅에 와있는 것 같다. 처음으로 구원을 느낀다”고 그의 누이에게 편지를 쓴다. 그 2년 후부터 1888년까지 이곳은 니체의 주요 거주지가 된다.

“지상의 가장 아름다운 구석. 내 고단한 삶의 모든 조건들이 이곳에서 충족된다. 이곳은 나에게 과람한 기대 이상의 선물”이라고 적은 니체는 실스마리아에 머물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비롯해 ‘도덕의 계보’ ‘우상의 황혼’ 등 걸작을 집필한다.

니체가 질병에 지친 몸을 추스르며 집필을 하던 소박한 집이 지금의 ‘니체하우스’(www.nietzschehaus.ch)다. 생모리츠에서 8km가량 떨어진 실스마리아 주도로의 한 귀퉁이에 있는 조그마한 집. 실스 호수를 산책하며 영원회귀의 사상을 정리하던 곳. 레아 쾨펠이라는 젊은 여성학자가 지키는 ‘니체하우스’는 6스위스프랑을 내고 입장하는 사람들에게 니체 데스마스크를 마주하는 전율과 낡은 책의 향기가 주는 안식을 선물한다.

전 세계의 니체 숭배자들이 성지처럼 생각하고 찾는 이곳은 박물관의 외양을 하고 있지 않다. 작아서 아름다운, 소박해서 평화로운 집이다. 너무나 작아서 어른이 잠들 수 있을까 궁금할 정도의 침대와 장식 없는 탁자. 니체가 주변의 사람들에게 요구한 것은 침묵뿐이었다.

“더없이 근소한 것, 더없이 조용한 것, 더없이 가벼운 것, 도마뱀의 바스락거림, 숨결 하나, 한순간, 눈길 하나. 이처럼 근소한 것이 최상의 행복을 만들어낸다. 그러니 조용히 하라!…조용히 하라!…방금 세계는 완전해지지 않았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생모리츠(스위스)=최윤호 기자 ukno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