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21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제50차 상임위원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자기 군대 작전통제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군대를 만들어 놓고 별들을 달고 거들먹거리고 말았다는 것이냐”며 역대 군 수뇌부를 비난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대통령자문기구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가 7월 새로 2년 임기를 시작하는 13기 자문회의 구성을 앞두고 대대적인 물갈이를 추진하고 있다. 12기 위원들의 임기가 6월 말 만료되는 데 따른 조치이지만 12월 대통령 선거를 불과 5개월 앞둔 시점인 데다, 진보 성향의 인사들을 대폭 충원하겠다고 예고한 상태여서 개편 의도를 둘러싼 논란이 일고 있다. 일각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친여(親與) 조직이라는 평을 듣고 있는 민주평통이 전국적인 조직을 이용해 대선에 개입하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도 한다.》
■75% 교체 2년만에… 대선 앞두고 또 “물갈이”
○“진보적-미래지향적 가치 담아내야”
김상근 민주평통 수석부의장(부총리급)은 23일 민주평통 자문회의 구성과 관련해 “민주, 평화, 통일은 진보적, 전향적, 미래지향적 가치이지 보수적인 가치는 아니다”라며 “절반쯤은 진보적 전향적인 분들이, 나머지 50%는 보수적 대표성, 중도적 대표성을 가진 분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해 보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국민의 (이념 성향을 나눠 보면) 진보, 보수, 중도가 40 대 40 대 20이라고 보지만 자문위원 배치는 민주, 평화, 통일이라는 진보적, 미래지향적 가치를 담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른 구성”이라고 주장했다. 12기 기준으로 1만7193명인 민주평통 자문위원을 이념적 기준에 맞춰 배분하되 소위 진보성향 인사의 비율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민주, 평화, 통일은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척도가 될 수 없고, 진보주의자들이 전유하는 이념적 가치가 아니라 헌법이 지향하는 기본 가치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이 같은 발언은 사회적 통념에 반하는 것이다.
민주평통의 한 관계자는 “김 수석부의장의 발언은 보수와 진보의 균형을 맞추겠다는 대원칙을 언급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의혹은 사라지지 않는다.
○수석부의장의 입김
그렇다면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은 자문위원 구성에 어느 정도나 영향을 미칠까.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법에 따르면 자문회의 위원 구성은 최고 심의의결 기구인 운영위원회의 결정 사항이다. 수석부의장은 49명으로 이뤄진 이 위원회의 운영위원장이다. 민주평통 관계자는 “대다수 운영위원의 동의가 없이는 수석부의장의 독단은 통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이던 2005년 7월 직능대표 자문위원 1만5562명 중 74.7%를 교체한 것을 보면 이런 설명은 설득력이 약하다. 이 장관은 당시 5회 연임 위원 배제, 20∼40세로 자문위원의 45% 충원, 여성 30% 할당 등의 기준을 새로 제시했다.
그 결과 2004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후보 공천을 받기 위해 뛰었던 인사, 노무현 대통령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지역 재야운동가 등이 상당수 민주평통 자문위원으로 진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6년 5·31지방선거에 출마했던 자문위원들의 면면을 보면 민주평통의 친여 성향이 더욱 분명해진다. 한나라당 권영세 의원에 따르면 당시 출마한 민주평통 자문위원 60명 중 열린우리당 소속이 34명으로 56.7%를 차지했다. 반면 한나라당 소속은 8명으로 13.3%에 그쳤다.
○노 대통령의 동지들?
노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21일 민주평통 상임위원회에서 자신의 외교안보 정책을 비판하는 예비역 군 장성 등을 비난하는 연설을 격정적으로 했다. 당시 행사에 참석했던 인사들은 이구동성으로 “민주평통 의장인 노 대통령이 민주평통 상임위원들을 자신의 ‘정치적 동지’라고 여긴 듯, 속마음을 드러낸 것 같았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25일 신년회견에서 대선 후보들에 대해 “(후보 간 차별성은) 사회복지, 민주주의, 인권 등 역사적 문제가 될 것이다. 차별성을 가지고 전선이 이루어지는 것이 도리다”라고 말한 것도 이념적 지향점이 같은 사람끼리 힘을 합쳐야 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태생적 한계 극복 못해
민주평통은 2002년과 2006년 지방선거에서 연거푸 야당인 한나라당이 ‘대승’을 거두는 바람에 지방정부의 냉대를 받고 있다. 민주평통 지역사무실을 대부분 시군구청에서 무상으로 제공한 것이 문제가 됐다.
전국 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는 지난해 11월 1일 성명을 내고 올해부터 민주평통에 지방예산을 지원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협의회는 “국가 사무를 맡는 민주평통이 매년 약 125억 원의 지방예산을 지원받는 것은 지방자치와 재정분권의 이념에 어긋난다. 국비로 운영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한나라당 소속 자치단체장이 대다수인 지방정부가 친여조직을 지원할 이유가 없기 때문일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민주평통은 유신 체제하에서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했던 ‘통일주체국민회의’의 후신이다. 그 때문에 관변단체라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민주평통은 통일주체국민회의가 1980년 폐지됨에 따라 이듬해 대통령자문기구로 발족했지만 역대 정권은 국내외 254개 지역협의회를 두고 있는 이 기구를 친정부적 성향의 인사들로 채우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노태우 정부 시절에는 1992년 총선을 앞둔 1991년 1만900여 명의 자문위원 가운데 7800여 명을 교체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민주화운동 관련 인사 등을 민주평통에 집중 배치하는 등 직능위원의 30% 이상을 물갈이했다.
역대 정부가 민주평통 자문위원을 자신들과 성향이 같은 사람들로 바꾸는 이유는 이들이 친정부 여론 형성에 일조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민주평통 자문위원은 크게 직능대표와 지역대표로 구성되는데 이들은 대개 업계와 지역의 유지들이어서 여론주도층으로 활동하고 있다.
○계속되는 존폐 논란
민주평통의 주 역할은 지역주민의 통일에 대한 여론을 수렴하고, 통일정책 관련 연구 결과를 의장인 대통령에게 건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연의 기능과 목적을 과연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2006년의 경우 민주평통이 사용한 예산 127억 원 가운데 통일정책 개발을 위한 예산은 20%가량에 불과했고 나머지 예산은 대부분 자문회의 개최를 위해 지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지난해 대통령에게 보고한 정책 건의사항도 몇 건에 불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평통이 본래의 역할을 이행하지 못하는 것은 실질적인 수장인 수석부의장이 정권의 ‘낙하산 인사’ ‘보은(報恩) 인사’로 채워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민주평통 11기 자문위원을 지낸 유호열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통일정책 연구 등에 적합한 인물보다는 정부와 관계가 있는 인물을 수석부의장에 임명하다 보니 친정부적 성격을 벗어나기 어렵다”고 말했다.
12기 자문위원인 김영수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회의장에서 다양하고 활발한 의견이 개진되더라도 이런 의견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통일정책 개발과 집행을 위해 통일부와 통일연구원 등이 있는 만큼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는 민주평통을 차라리 폐지하는 것이 낫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재교 변호사는 “헌법기관이지만 설치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임의기관이므로 폐지해도 위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민주평통 측은 자문위원 개편에 대해 “지역유지들의 친목단체로 변질돼 ‘양로원’ 소리를 들어 온 조직을 쇄신한 조치이지 정치적 의도는 전혀 없다”고 항변했다.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