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직원 ‘한마음 파티’ 아모레퍼시픽 뷰티트렌드팀과 기업문화팀 직원들이 회사 구내식당에서 ‘굿타임 파티’를 열고 있다. 회사 측은 사내 팀 및 상하 남녀 간 화합을 위해 2개 이상 현업 부서의 요청이 있을 경우 장소와 술, 안주 등을 회사 비용으로 마련해 주고 있다. 사진 제공 아모레퍼시픽
《19일 경기 용인시 기흥구 보라동 태평양 인재개발원 강의실. 30여 명의 아모레퍼시픽(옛 태평양) 남녀 직원이 한창 역할극을 하고 있었다.
팀장 역할을 맡은 미용교육팀의 강윤수(27·여) 씨가 강압적으로 말했다. “오늘 저녁 회식이다. 약속 있는 사람은 모두 취소해.”
신입 여직원 역할을 맡은 유통연구팀 이병효(41) 팀장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남자친구에게 전화 거는 시늉을 한다. “자기야 난데, 갑자기 회식이래. 짜증나.”
순간,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날 역할극은 아모레퍼시픽이 지난해 8월부터 실시해 오고 있는 ‘균형 잡힌 조화(Balanced Harmony) 교육과정’ 중 하나. 연극을 통해 남녀, 고하 직위 간 역할을 바꿔 상대방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 위한 것이다.》
○ 남자여, 군대를 잊어라
최근 국내 기업들 사이에서 ‘여성 배우기’ 열풍이 불고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회사 내에 여성 인력 비율이 높아지고 있는 데다 최근 들어 간부로 진급하는 여직원이 증가하면서 여성 상사나 동료 후배에게 잘 적응하지 못하는 남성 직원이 속속 생겨 나고 있기 때문.
삼성SDS는 지난해 팀장 진급자를 대상으로 2시간 동안 여성에 대한 특강을 실시한 데 이어 올해부터는 2박 3일 일정의 ‘리더십코어’ 교육에 과장급 남성 직원들을 참가시키기로 했다.
CJ 삼성전자 등도 조직 내 남녀 화합과 여성 리더십을 키우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아모레퍼시픽에 따르면 여성 직원 비율이 10%가 채 안 되던 1990년대 회사 분위기는 화장품 회사라는 이미지와 달리 말 그대로 ‘군대’였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여성 인력 비율이 25%를 넘어서자 결과를 중요시하는 남성 상사와 부하, 과정도 중요시하는 여성 직원과 상사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삼성SDS도 여성 인력 비율이 1995년 이전에는 10%에도 못 미쳤으나 최근 20% 가까이 늘어났다.
그러나 인사팀에서 지방 부서에는 주로 남성을 발령 내다 보니 본사나 수도권 사업장의 여성 비중이 특히 높아졌다. 팀원 9명이 여성이고 팀장만 남성인 부서도 있을 정도.
여성 상사를 어떻게 모셔야 하는지, 일 못하는 여성 부하를 어떻게 혼을 내야 하는지, 회식이나 술좌석에서 여직원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를 몰라 끙끙대는 남성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거래업체 담당 직원이 여성일 경우도 어떻게 접대해야 하는지도 고민거리.
○ 남성과 여성, 사고방식부터 다르다
기업마다 여성 이해하기 교육프로그램의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핵심은 여성과 남성은 사고방식부터 다르다는 것을 깊이 이해하는 것.
아모레퍼시픽의 ‘균형 잡힌 조화’ 교육은 경기 용인시 기흥구 태평양인재개발원에서 1, 2주에 한 차례씩 진행된다.
임직원들은 팀 단위로 오전 9시부터 △세대 차이 △남녀 차이 등 크게 두 주제를 놓고 8시간 동안 진단지 작성, 동영상 감상, 통계분석, 역할극 등을 통해 현재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해결책을 찾아내는 데 주력한다.
역할극 외에 적성검사와 유사한 ‘남녀 두뇌회로 테스트’, ‘정신연령 테스트’, 최신곡과 흘러간 가요 곡명을 맞히는 ‘추억의 노래방’ 등도 프로그램에 포함됐다.
현실 속의 문제점을 찾아 고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교육은 강의식보다는 교육 참가자 간 토론 위주로 진행된다. 강사는 주로 주제를 제시하고 질문을 던진다.
가령 ‘남자는 왜 길을 묻지 않을까’를 주제로 차를 운전하며 30분 동안 헤매면서도 끝끝내 행인에게 길을 묻지 않고 혼자 목적지를 찾겠다는 남자와, 길을 묻자고 주장하는 여성 사이의 대화 샘플을 놓고 남녀 참가자들이 토론하는 식이다.
삼성SDS의 ‘리더십 코어’ 과정은 2001년부터 지난해까지는 과장급 여성만 대상으로 실시해 왔으나 올해부터 남성들까지로 확대했다.
이 과정은 △남녀 차이 인정 △여성 간부가 당면할 수 있는 여러 문제를 남성 간부가 이해하기 △남성이 여성 간부와 대화하는 법 등의 교육을 통해 조직 내에서 남성과 여성이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여 회사의 생산성을 제고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CJ는 교육은 아니지만 사내에 무기명 게시판을 만들어 여성 직원들의 주장이나 요구사항을 받아들이고 있다. 삼성전자는 전문 상담원 14명을 두고 전체 임직원을 대상으로 직장 내 남녀 상하 간 대인관계와 관련된 상담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 어떻게 다른지 알아야 이해할 수 있어
교육에 참가한 남성 직원들은 “서로를 인정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다.
최근 교육을 받은 아모레퍼시픽 녹차연구팀 유세진(29) 연구원은 “나는 20대여서 30, 40대 선배들과 달리 여성과 잘 지낸다고 자신했는데 교육 과정에서 나 역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유 연구원은 미녀가 강아지를 끌고 승용차 앞을 걸어가는 내용의 동영상을 틀어줬을 때 남성 직원들은 개나 자동차가 갖고 싶다고 얘기한 반면 여성 직원들은 하나같이 “저 여자가 입은 옷을 갖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답변이었던 것.
그는 “서로를 이해하기 전에 서로 어떻게 다른지를 아는 것이 순서인 것 같다”고 말했다.
나성엽 기자 cp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