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나탈리 골드버그 지음·권진욱 옮김/271쪽·1만1000원·한문화
‘잘 읽기’는 누구나 강조하는 논술의 첫출발이다. 그런데 꼼꼼히 읽고 분석해 봐도 생각은 쉬이 글로 풀어지지 않는다. 마음 안에 흘러 다니는 생각은 강물보다는 바람 쪽이다. 무엇을 붙잡아 드러내야 할지, 손에 쥔 연필은 맴만 돈다.
어려운 기출 문제에 주눅 든 학생들에게 무작정 글을 쓰라는 것은 고문에 가깝다. 다람쥐는 그 많은 열매 중에 도토리만 모은다. 글 안에서 내 삶과 연결된 맥락을 발견해야 한다. 나에게 의미 있는 것을 잡아채지 못하면 남의 생각만 나열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이 책은 마음에 고여 있는 생각들을 휘저어 글로 뱉는 법을 가르쳐 준다. 죽은 말에게 달리라고 채찍질을 할 것인가. 읽은 것이 생활과 섞여 발효될 때, 논술이건 수필이건 숨 쉬는 글이 된다. 저자의 시범을 따라가 보자. 빨리 글을 쓰고 싶어 어서 책이 끝나기를 바라는 것도 신선한 체험이지 않겠는가.
우선 자기와 약속부터 하자. 내면의 검열관을 없앨 것! ‘선생님이 이런 걸 원하는 것 같으니까’ 같은 생각은 자기 목소리를 멈추게 한다. ‘첫 생각’이 떠오를 때 무작정 밀고 가라는 것이 저자의 특급 처방이다. 손을 무작정 밀고 가라, 편집하려 들지 마라, 마음을 통제하지 마라 등이 저자의 응원 구호다.
하지만 쓰다 보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에 발목이 잡힌다. 10분, 20분, 1시간. 시간의 길이는 각자가 정하되 무어라 쓰고 있든 멈추지 말고 써야 한다. 정해진 시간만큼은 완벽히 채우고, 규칙적으로 반복하라! 달리기 선수가 “난 어제 뛰었으니 오늘은 몸을 풀지 않아도 돼”라고 하지 않듯, 글쓰기는 반복되면서 자신의 숨은 가능성을 밀어 올린다.
그런데 무엇을 쓸까. 저자는 글쓰기 목록을 만드는 방법도 제안한다. 방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빛의 느낌에 대해, 오늘 아침 나의 모습에 대해, 개미가 되었을 때 보이는 세상에 대해, 시집 한 권 중 아무 글귀나 골라 그것을 첫 문장으로 삼아 무작정 글을 쓴다. 글의 내용은 내가 살다가 걸려 넘어진 지점을 탐색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세상에 내놓는 ‘발언대’의 생생한 목소리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글쓰기의 세부 기법은 결국 세상에 대한 나의 반응을 풍요롭게 한다. 사진을 보듯 선명하고 쉬운 어휘를 쓸 것, 분노의 감정을 사물만으로 표현할 것 등도 따라 해 보자. 막연하던 생각의 더듬이가 돌 속에서 형상을 뽑아내는 조각품처럼 나의 체험마다 이름을 지어 줄 터다.
결국 글쓰기는 ‘자기 보기’에 있다. 줄기세포 하나가 여러 신체 조직으로 분화하듯, 정신의 힘줄이 튼실해야 다양한 글쓰기가 가능하다. 설익은 지식으로 소화불량에 휩싸이는 학생보다, 사소한 것 하나에도 세상을 담을 때 그 안목이 가장 소중하다.
권 희 정 상명대부속여고 철학·논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