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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74년 美극좌파, 허스트家상속녀 납치

입력 | 2007-02-07 02:56:00


“삶이란 총을 똑바로 쏘는 것이다.”

SLA(Symbionese Liberation Army). 일명 ‘공생(共生) 해방군’. 미국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좌파. 총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아나키스트들의 집단이다.

단원은 12명 정도로 동네 반상회 수준이었다. 그러나 SLA는 하루아침에 전국적인 유명 단체로 떠오른다. 1974년 2월 7일 버클리의 한 라디오방송국에 보낸 편지가 발단이다. “퍼트리샤 허스트는 우리의 보호 아래 있다.”

19세인 퍼트리샤 납치는 단순한 유괴가 아니었다. 영화 ‘시민 케인’의 실제 모델인 신문왕 윌리엄 허스트의 손녀. 미국 최대 신문재벌의 유일한 상속녀였다.

정치테러범답게 요구도 거창했다. 무산계급에 재산을 분배하라는 것이다. 허스트가(家)는 빈민가에 수백만 달러의 식료품을 나눠줬다. 산하 신문들은 납치 명분을 설명하는 광고도 실었다. SLA의 승리로 보였다.

인질 퍼트리샤의 감화는 보너스였다. ‘스톡홀름 증후군.’ 집으로 돌아가길 거부했다. 테러범과 사랑에 빠져 임신을 했다. 돈 많은 부모를 부정하고 이름까지 바꿨다. 체 게바라의 애인에게서 따온 ‘타냐’가 새 이름. 정식 단원이 되어 총까지 들고 나서 은행도 털었다.

문제는 대중의 반응이었다. 빈민층의 열광을 기대했으나 돌아온 건 납치범 취급. SLA는 규합세력도 없이 도망 다니기에 바빴다. 나중엔 사회적 이슈가 아니라 생계를 위해 강도짓을 했다. 시골 양장점에서 옷을 훔쳐 입는 신세가 됐다.

1974년 4월 샌프란시스코 은행 습격은 궤멸의 서막이었다. 길 가던 임신부를 총으로 쏴 숨지게 만든다. 민심은 등을 돌렸다. 잔학한 살인자의 낙인. 592일의 기나긴 도주 길에 오른다.

끝 역시 처참했다. 1975년 여름 총격전 끝에 6명이 사살된다. 퍼트리샤는 현장에서, 나머지는 이후 차례로 붙잡혔다. 마지막 도망자마저 2002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체포됐다.

SLA는 처음부터 실패자였다. 단원 대부분은 1960년대 히피 사상에 경도된 백인 중산층. 새로운 경쟁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무력감을 테러로 표출했다. 총을 똑바로 쏘긴커녕 들 자격조차 없었다.

승리자는 퍼트리샤였다. 21개월 만에 가석방되고 2001년 복권된다. 경험을 책으로 펴내고 영화도 찍었다. 정치 테러 가담을 철없던 시절의 실수담으로 만들 만큼 그에겐 돈이 많았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