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시대 일본 근대화의 기수
《정치와 관련된 나의 언행은…소위 진찰하는 입장에서, 정부 내에 지위를 점하고 정권을 휘두르며 천하를 치료할 뜻은 없지만, 아무래도 국민 모두를 문명개화의 문으로 인도하여 일본을 병력이 강하고 상업이 번창한 대국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근대 이후의 일본을 생각할 때 후쿠자와 유키치가 주장했던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의 관점에서 보자면 일본은 전근대 아시아에서 탈피하는 데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럽의 한 쪽이 되지도 못하였고 아시아에 복귀하지도 못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근대 일본 서구문명의 길라잡이였던 후쿠자와는 메이지(明治)시대 일본 근대화의 방향을 서구화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창한 사상가이자 교육가로 게이오(慶應)대를 설립했다. 특히 그의 초상은 오늘날 일본은행권 최고가 화폐인 1만 엔권 지폐의 앞면에 새겨져 있고 일본인들에게는 근대 일본의 민주화에 공헌한 인물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다. 그렇다면 그는 실제 어떤 인물이었을까?
후쿠자와는 소년 시절 학문에 뜻을 두고 봉건적이고 계급적 질서의 근거로 비판받았던 한학 등에 반발하여 나가사키와 오사카에서 난학(네덜란드학) 공부에 몰두하였다. 20대 중반에 도쿄에 가서 당시 세계의 중심이 네덜란드가 아니라 영국 미국 등 영어권이라는 사실에 놀라 학문의 방향을 영학(英學)으로 바꾸었다. 그는 1860년 미국을 최초로 방문했던 일본 사절단에 합류해 샌프란시스코를 찾았고, 몰락 직전의 막부에서 외국 관련서류 번역담당관으로 근무했다. 1861년에는 막부의 유럽 사절단 일원으로 약 1년에 걸쳐 미국과 유럽을 순방했다.
이런 경험으로 유럽과 미국의 학문 및 서구사상에 본격적으로 눈을 뜬 그는 ‘서양사정’(1866년)을 비롯한 엄청난 저술활동으로 당대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랐고 또 저작물 수입을 바탕으로 게이오의숙을 창설하였다. 1868년 에도막부가 몰락한 뒤 신정부에 참여하지 않고도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핵심 정치가들과의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하며 당대 오피니언 리더로 자리 매김했으며, 서구화를 지향하는 재야인사이자 친정부적 국권론자로 변모해 나갔다. 그의 이상은 그가 남긴 어록 중에서 가장 유명한 ‘독립자존’이라는 한마디에 압축돼 있다고 하겠다.
후쿠자와는 1882년 임오군란 후 조선에서 청국 세력이 확대되자 조선의 급진개화파를 지원해서 그들이 스스로 국내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봤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는 그의 기대를 저버렸다. 이후 그는 1885년 3월 16일 ‘탈아론’을 시사신보에 발표하며 일본이 다른 동양 국가들과 협조할 게 아니라 그들을 넘어서자고 주장했다.
그의 생애를 더듬어 보면 한국의 근대는 왜 일본과 다르게 시작했는지 알 수 있다. 개방과 근대화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사회 인식과 이를 부채질한 지도층의 빈약한 국제 인식 등 19세기 말 우리는 너무 다른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일본의 침략이 정당화될 순 없으나 당시 우리의 안이한 대응을 지적하지 않고서는, 이 같은 일이 반복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서민교 연세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