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 29일 저녁, 청와대 영빈관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그해 4·15총선에서 압승한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당선자들을 위한 만찬에서 33명의 ‘386 당선자들’은 주먹 불끈 쥐고 목소리 높여 승리를 자축(自祝)했다. 그것은 단순한 합창이 아니었다. 그들 중 누군가 말했듯이 그 노래는 ‘대한민국 심장부에서 역사가 새로 쓰이고 있음을 선언한 것’이자 ‘민주화운동 세력이 한국 사회의 주류로 등장했음을 확인한 것’이었다.
새 옷 입고 ‘자기부정’해서야
왜 아니 그랬겠는가. 2003년 11월 고작 47명의 원내의석으로 출범했던 당이 일약 152석의 원내 과반수 정당으로 둔갑했으니 그들로서는 행정권력과 의회권력을 함께 장악한 완벽한 승리였다. 그들은 외쳤다. “건국 이래 처음으로 개혁세력이 의회를 장악했다”고.
열린우리당의 비극은 그렇게 시작됐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민주화의 도정(道程)에서 희생된 이들에 대한 ‘씻김굿’이어야 했다. 제의(祭儀)를 마치고 서둘러 국민 곁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탄핵 역풍(逆風)’에 담긴 민의(民意)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읽지 못했다기보다 읽으려 들지 않았다. 국민은 원내 과반수 정당을 만들어 줄 테니 경제와 민생을 최우선 순위로 일상의 삶에 와 닿는 개혁을 하라고 당부했건만 그들은 여전히 ‘80년대의 논리’에 매몰된 채 ‘승자(勝者)의 적의(敵意)’를 감추지 않았다.
설득의 과정을 생략한 조급하고 무리한 개혁담론은 그 명분의 정당성마저 날려 보냈고, 철 지난 이념과 설익은 방법론의 대립은 집권 여당의 혼선만 부각시켰다. 여기에 ‘노무현’으로 상징되는 불안정성과 분열의 이미지가 겹쳐졌다. 청와대와 여당은 줄곧 당정 분리를 내세웠지만 국민의 눈은 대통령과 여당을 분리하지 않는다. 여당의 간판은 ‘노무현 당’일 뿐이다. 2005년 이후 치러진 각종 재·보선에서 열린우리당은 ‘40 대 0’의 참담한 성적표를 받았다. 정부의 실정(失政)과 여당의 무능이 맞물리면서 민심이 철저히 등을 돌린 것이다.
우르르 몰려나온 탈당파의 얘기는 한마디로 ‘노무현 당’으로 각인된 열린우리당 간판으로는 대선은 물론 다음 총선에서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잔류파의 속내도 다르지 않다. 그들은 앞 다퉈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하고 있다.
탈당파와 잔류파의 공통분모가 ‘비노(非盧) 반(反)한나라당’에 있음은 분명하다. “탈당의 강물이 대통합의 바다에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소리는 헤쳐 모여 재집권을 이루자는 그들의 염원(念願)이다. 그러나 세탁해 새 옷 입고 자기부정(自己否定)을 한다고 해서 누가 새 사람이 됐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이제 ‘노무현’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하고 있지만 그것은 ‘동지의 의리(義理)’를 떠나 정당정치의 근본에서도 벗어나는 일이다. 집권 여당으로 실패했으면 야당 하는 것이 당연하다. 야당 하면서 여당과 경쟁해 국민의 지지를 얻어 다시 집권하는 것이 순리(順理)다. 선택의 주체는 마땅히 국민이다. 우리가 재집권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식의 소리는 그만두어야 한다. 그 점에서는 대연정(大聯政)을 제안했던 대통령의 인식이 오히려 건강하다.
누가 따를 것인가
백보를 양보해 ‘평화민주개혁세력 통합’의 밀알이 되려 한다는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적어도 자신들의 실패에 책임지는 자세부터 보여야 했다. 국회의원 배지 달고 나가면서 ‘우리 자신을 허허벌판에 내던진다’고 해서야 무슨 울림이 있겠는가.
이제 백년을 함께하자고 했던 동지는 간 데없다. ‘진보 개혁의 깃발’도 더는 나부끼지 않는다. 대통령과 여당의 실패가 남긴 가장 큰 손실은 바로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진보를 말함으로써 진보를 희화화(戱畵化)하고 부끄럽게 한 잘못에서 그들은 모두 자유로울 수 없다. 누가 있어 그들을 따를 것인가.
전진우 大記者 youngj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