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타이처럼 습관적으로 맸던 ‘빨간 머리띠’를 웬만하면 매지 않을 생각이라고 이석행 민주노총 새 위원장이 말했다고 한다. 그는 또 (좌파 학자 등) 이론가들의 ‘투쟁 훈수’에 흔들리지 않겠음을 밝혔다고 한국경제신문이 어제 보도했다.
민주노총이 과연 대화와 타협, 비폭력 탈정치의 새 노동운동사를 쓸 수 있을지 아직은 미덥지 않다. 지도부, 반대파, 산하 조합원 사이에 시장원리, 자유기업주의, 경영권 및 사유재산권 보장 등에 대한 공감이 있는지부터 의문이다. 수구(守舊) 좌파세력의 뿌리는 워낙 깊다.
그럼에도 이 위원장의 말은 민주노총의 ‘좋은 변화’ 가능성에 한 가닥 기대를 걸게 한다. 대다수 국민뿐 아니라 많은 현장 노조원도 상습적 불법 파업에 염증을 느껴 왔다. 지난달 위원장 선거에서 온건파로 알려진 이 씨가 당선된 것도 그 결과다. 그렇다면 민주노총을 변화시킬 여건은 상당히 마련된 셈이다.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은 일찍이 노사 윈-윈을 위한 노력을 행동으로 보여 줬다. 그는 투자 촉진과 일자리 창출 없이는 노조도 살아남을 수 없음을 설파하는 전도사 같다. 밖으로는 해외 자본가들을 안심시키고, 안으로는 양보와 타협의 노사정(勞使政) 모델을 만드는 데 앞장섰다. 분규 기업의 노사 양쪽을 설득해 평화를 찾아주기도 했다.
꼭 할 일 밀쳐두고 對국민 투쟁?
노무현 대통령은 기업가보다는 노동자 편에 서 왔다. 약자(弱者)를 돕겠다는 정의감과 다수(多數)를 품겠다는 정치적 계산이 섞여 있는 듯하다. 그러면서 귀족노조에 대해서는 상당한 반감을 드러냈다. 대통령은 이들의 지나친 이기심과 무분별한 투쟁에 화도 냈고, 그런 노동운동이 경제를 해친다는 점도 따졌다.
지금부터라도 민주노총이 소수의 노동귀족 중심이 아니라 다수의 현장 근로자 위주로, 조직 내부뿐 아니라 비정규직 등 조직 밖 근로자들의 고통을 분담하면서, 사용자의 이익도 중시하고, 나라경제 전체의 경쟁력 제고까지 생각하는 노동운동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점차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면서 근로자 복지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달 25일이면 노 대통령의 임기가 그야말로 1년 남게 된다. 임기의 5분의 4를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해 새삼 옥신각신해 봐야 민생과 나라를 위해 생산적일 것 같지 않다. 그보다는 끝이 보이는 하산 길을 어떻게 걸어갈 것인지가 중요하다.
한국노총 이 위원장은 신년 벽두 경제점검회의에서 대통령에게 “말을 아껴 달라”고 고언(苦言)을 했다가 “말 가려서 하라”는 찬물을 덮어써야 했다. 당장 청와대 홈페이지에 들어가 봐도 각계에 대한 불만과 항변이 넘쳐 난다. 마치 청와대가 나라 전체를 향해 ‘빨간 머리띠’를 매고 눈을 부릅뜨는 것처럼 느껴진다.
대통령과 비서실장은 개헌을 공론화하지 않는다고 정치권, 언론, 지식인을 싸잡아 공격한다. 홍보비서는 ‘날림 장기(長期)정책 남발’을 비판하는 여론에 대해 ‘정부가 폐업하란 말이냐’고 역공한다. 정무비서와 기획예산처 간부까지 나서서 한나라당과 언론에 화살을 쏘아 댄다. 진짜로 ‘빨간 머리띠’를 매고 싶은 쪽은 국민인데 말이다.
정부가 할 일은 많다. 대통령 스스로 남은 임기의 최대 과제로 강조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성사,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위한 신속한 규제 제거, 법치(法治)의 솔선, 납세자에 대한 정부서비스의 품질 향상, 국가 존립과 국민 생존에 직결되는 안보 경제 교육 등에서 잘못 파괴해 온 것들의 최대한 복원(復元), 중립적이고 공정한 대선 관리…. 여기까지만 손꼽아도 할 일은 많고 1년은 짧다. 북핵 대응은 얼마나 더 큰 일인가. 남 탓할 시간과 에너지를 다 돌려도 모자랄 지경이다.
恩怨털고 버림의 美學보인다면
그래도 대통령 임기는 마라톤으로 치면 8.4km나 남았다. 이제라도 정상 주법(走法)으로 고쳐 뛰면 기록을 어느 정도는 만회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는 것이 정권과 국민의 불행을 다 줄이는 길이다.
그래 봐야 안 바뀔 거라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지만 한마디만 더 하고 가자. 국민을 향한 ‘빨간 머리띠’를 풀고, 지난 4년의 은원(恩怨)도 털고, 버림의 미학(美學)을 보여 주기 바란다. 한국노총은 진작 변했고, 민주노총도 변화의 조짐을 보이는 터에 대통령이 바뀌는 모습을 보고 싶다.
배인준 논설주간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