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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 X파일]스패머-스토커가 되어 건진 ‘30억 장비’

입력 | 2007-02-23 03:01:00


“정 그렇게 원하신다면 3, 4년쯤 빌려드리지요.”

은발의 노신사 쿠르트 후브너 박사는 값비싼 가속기를 공짜로 넘겨 달라는 황당한 부탁을 하는 초면의 한국 과학자가 마음 상하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해 말했다. 사실 그 대답은 정중한 거절이었다. 말이 쉽지 무게만 수십 t에 이르는 거대한 장치가 빌리거나 빌려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서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0년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대형 전자가속기 시설을 설치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가장 큰 어려움은 핵심 장치인 초전도 가속기를 확보하는 문제였다. 짧은 시간에, 그것도 한정된 예산으로 그런 고가 실험 장비를 장만하기란 만만치 않은 과제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유럽가속기연구소(CERN)가 비슷한 성능의 가속기를 해체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곳저곳에 e메일을 보내고 CERN이 있는 스위스 제네바로 날아갔다. 실제로 그곳 과학자들을 통해 알아봤더니 정말 우리가 딱 원하는 장치였다.

이제 시가 30억 원이 넘는 이 장치를 받아내는 일만 남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지 않는가. CERN 소장인 후브너 박사는 생면부지의 젊은 과학자의 면담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차분히 설명을 듣더니 “담당자를 소개할 테니 한번 협의해 보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가속기에 관여하는 CERN의 수많은 과학자를 설득하는 일은 만만찮은 작업이었다. 여러 차례 현지로 건너가 그들에게 협조를 구하고 e메일 주고받기를 수백 통. 결국 CERN 과학자들은 가속기를 넘기는 데 동의했다.

더 큰 문제는 그 뒤에 벌어졌다. 크고 복잡한 가속기를 옮기자면 30명이 넘는 현지 과학자들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바쁜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연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에 발 벗고 나설 리가 없었다. 게다가 공짜로 장비를 가져가는 마당에 또 도움을 요청하다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다시 한 번 그들을 물고 늘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연구의 목적과 그들의 도움이 필요한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했다. 그렇게 양쪽에서 주고받은 e메일만도 1000통이 훨씬 넘는다.

당시 ‘공짜’로 들여온 초전도 가속기가 이제는 한 해 논문 약 60편, 특허 약 10건을 쏟아내는 ‘황금거위’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러나 ‘무상 도입’의 배경에 집요한 ‘스토커’와 ‘스패머’가 돼서 해외 과학자를 ‘괴롭힌’ 과학자들의 ‘로비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이병철 한국원자력연구원 책임연구원 bclee4@kaer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