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철 전 주미대사는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화해와 동북아 및 세계 평화를 위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서의 역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DJ)은 지난 18일부터 나흘간 부인 이희호 여사와 측근들을 대동하고 일본 오키나와로 휴가를 다녀왔다. 해외여행은 1996년 8월 괌 여행 이후 11년 만이었다. 이번 여행에는 최근 사면복권 조치를 받은 후 ‘동교동 복귀’를 공언한 박지원 전 문화부장관과 양성철 전 주미대사, 주치의인 장석일 박사가 동행했다. 기자는 22일 오후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의 한 찻집에서 양 전 대사를 단독으로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DJ, 2·13 합의로 상당히 고무된 상태”
양 전 대사는 이번 동행에 대해 “내가 정치색이 제일 적기 때문에 같이 가자고 연락한 것 같다”며 여행 후일담을 들려줬다.
“첫날 오키나와 공항에 도착한 이후 곧바로 전사자들이 안치된 ‘평화의 묘’에 들렸어요. 오키나와는 2차 대전 때 전사자들이 23만 명에 달할 정도로 격전지였습니다. 김 대통령은 그곳에서 일본군으로 참전했던 한국인 전사자들에게 헌화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여기저기 관광하며 쉬셨어요. 편안하고 가벼운 여행이었죠.”
그는 오키나와 체류 기간 중 “2·13 합의에 대해 주로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이번 6자회담에서 2·13 합의를 끌어내서 다행입니다. 대결 구도에서 대화·협력 분위기로 큰 틀이 바뀌었으니까요. 김 대통령도 굉장히 좋아하세요. 다자간협의체가 생겼을 뿐 아니라 북일, 북미 관계를 정상화할 틀도 마련됐고,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체제 및 비핵화 실현을 위한 실무협의체도 생겨서요. 엄청난 진전이기 때문에 김 대통령은 상당히 고무된 상태입니다. 원래 낙관적이신 분인데 이번 타결로 더 낙관적이 되셨어요.”
그는 “김 대통령은 지금이 남북 관계를 진전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현재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에서 지리멸렬하고 있습니다. 앞도 안 보이고 퇴로도 안 보이는 상황이죠. 미국 내 여론도 좋지 않고 의회에서는 민주당이 다수당이 됐고…, 그렇기 때문에 김 대통령은 ‘지금이 아주 좋은 시기’라고 하시더군요.”
“DJ는 국내 정치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양 전 대사를 만난 날. DJ의 핵심 측근인 동교동 인사들은 서울시내의 한 식당에 모여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과 박지원 전 실장, 설훈 전 의원의 특별 사면복권을 축하했다. 이날 모임에는 한화갑 민주당 전 대표와 정균환 민주당 부대표를 비롯해 DJ의 장남인 김홍일 전 의원도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모임을 두고 정치권에선 “DJ를 중심으로 한 동교동 가신들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양 전 대사에게 이에 대해 언급하며 DJ의 향후 정치적인 역할에 대해 물었다. 그는 단호하게 “김 대통령은 국내 정치에는 절대 관여하지 않겠다고 누차 말해왔다”며 DJ의 ‘국내 정치 불개입’을 강변했다.
“김 대통령께선 노벨평화상을 받은 분으로서의 남북화해와 동북아 및 세계 평화를 위해 역할을 하려고 해요. 작년에는 활동이 좀 뜸하셨지만 올해에는 해외 여러 나라를 돌며 활발하게 활동할 겁니다. 국내 정치는 관여 안합니다.”
그는 ‘건강 이상설’을 의식한 듯 “식사도 잘하시고 굉장히 건강하다”며 올 한 해 동안 해외 일정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DJ의 방북과 관련해서는 “작년에 기회가 있었지만 서로 조건이 안 맞아서 좌절됐다. 그 이후 행보는 본인이 아니기 때문에 언급할 수 없다”며 말을 아꼈다.
“박지원 실장은 억울한 경우를 당했다”
양 전 대사는 박 전 실장의 향우 정치적 행보와 역할과 관련해서는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그러나 박 전 실장의 구속·수감과 관련해서는 “억울한 경우를 당했다”며 박 전 실장을 변호했다.
“판단에는 언론, 정치, 사법부, 사회·자연 과학자, 역사학자, 신의 판단 등 ‘여섯 가지 판단’이 있다고 생각해요. 언론에서 역사학자로 갈수록 판단의 오류가 줄어듭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요. 법의 심판이 나름대로 시간이 다소 걸리기 때문에 오류가 적긴 하겠지만 그래도 억울한 경우가 많죠. 박지원 실장도 상당히 억울한 경우죠.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겠습니까.”
그는 “인간이란 원래 불완전한 존재”라며 “완전무결한 판단을 하는 건 어렵다. 신만이 진실을 규명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햇볕정책은 한민족의 장래와 한반도 평화정책 위해 꼭 필요”
화제는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으로 이어졌다. 양 전 대사는 “햇볕정책은 이론적인 기반을 바탕으로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추진된 것”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EU는 처음에 6개 나라로 시작해서 오늘날 27개국이 됐습니다. 대화를 통해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 협력을 한 결과 오늘의 EU가 탄생한 거죠. 김대중 정부는 ‘EU 모델’을 이론적인 기반으로 해서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햇볕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는 “햇볕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들에게 ‘대안이 뭐냐’고 물으면 아무도 말을 못한다”며 “햇볕정책은 초정치적인 것이자, 한민족의 장래와 한반도의 평화 정착을 위해 꼭 필요한 정책”이라고 강조했다.
양 전 대사는 ‘햇볕정책’을 ‘대북퍼주기’라고 매도하는 시각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대북지원은 퍼주기가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당장 남북 간 긴장이 고조되면 수출이 위축되고 투자가 줄어들어요. 또 서독이 통일 전에 동독에 투자한 액수에 비하면 우리의 대북지원은 ‘새 발의 피’예요. 무엇보다 북한은 우리 동포 아닙니까. 지금까지 북한에서 굶어 죽은 사람이 2백만에서 5백만 명에 달한다죠. 북한은 아시아의 르완다 같은 곳이에요. 그런 우리 동포를 도와주는 겁니다.”
그는 “대북지원은 절대 퍼주기가 아니다”며 “북한 동포의 어려움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양 전 대사는 “대북지원 물자가 군비를 확장하는 데 쓰였다고 하는데 그건 말이 안 된다”고도 했다.
“핵문제로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해외의 여러 자선단체들이 북한에 들어가서 238개 군(郡)의 배급 상황을 모니터링했어요. 실제로 주민들에게 전달되는지를 말이죠. 상황이 이런데도 군비전용을 주장하는 건 어불성설이죠.”
“DJ와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난 참 행운아”
양 전 대사는 1965년 하와이에서 DJ를 처음 만났다. 당시 민주당 선전부장이던 DJ는 美국무성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가던 중 하와이에 들렸다. 그때 양 전 대사가 통역을 담당했다. 그날 맺어진 인연이 지금까지 굳건하게 이어져오고 있는 것. DJ를 40년 넘게 지켜본 양 전 대사는 “김 전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나는 참 행운아”라며 DJ에 대한 촌평을 내놨다.
“김 대통령은 집념이 대단한 분이세요. 197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이후 1998년에 대통령에 취임한 건 아마 세계기록일 겁니다. 보통 한 번 떨어지면 그만하기 마련인데 김 대통령은 네 번 도전했고 결국 당선됐죠. 지난 세월 동안 김 대통령은 고생도 극심했고, 책도 많이 읽었죠. 그분의 인생행로가 주는 무게감은 대단합니다.”
김승훈 동아닷컴 기자 h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