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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영원한 청춘

입력 | 2007-02-27 03:03:00


《경영은 끊임없는 창의적 연구를 통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이다. 나는 경영이란 본래 그 가치가 매우 높은 예술적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경영자는 종합예술가라 할 수 있다.》

초등중퇴 점원서 ‘경영의 신’으로

다신교를 믿는 로마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람은 죽어서 신(神)이 됐다. 그러나 신전은 정치가와 군인들이 차지했고 상인들은 꿈도 꾸지 못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전통이 강한 일본에서도 상인의 지위는 마찬가지였으나,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1894∼1989)는 큰 발자취를 남기고 ‘경영의 신’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점원 생활을 시작한 마쓰시타는 1917년 23세에 ‘마쓰시타 전기제작소’를 설립한다. ‘회사 근무는 하루 일하면 하루치 급료를 주었으므로 쉬는 날은 밥을 먹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그래서 쉬더라도 먹고살기 위해 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초라하게 시작했지만 연결 플러그, 자전거 램프 제조에 성공하면서 사업은 번창했다. 그러던 1932년 5월 5일 마쓰시타는 사업가로서의 사명이 ‘가난 극복, 물자를 풍족하게 생산해 사람들이 수돗물처럼 마음껏 쓰게 한다’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는 이날을 창업 기념일로 정한 뒤 250년간을 사명달성기간으로 정해 1기인 25년을 자신이 책임진다고 생각할 만큼 긴 호흡의 사고를 펼쳤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의 어려움 속에서 재기한 그는 1951년 승전국인 미국을 처음 방문해 그 풍요로움에 놀라면서도 마음을 열고 세계를 배운다. 본격적으로 해외 진출을 전개한 마쓰시타는 네덜란드 필립스와 제휴하면서 1959년부터 다가온 무역과 외환 자유화의 물결을 앞장서 수용해 일본이 개방경제 체제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1973년엔 회장 직을 사임한 뒤 사회사상가이자 미래기획자로 변신한다. ‘민주주의는 번영주의’이지만 ‘경제가 아무리 발전해도 정치가 바뀌지 않으면 진정한 풍요로움은 찾아오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린 그는 21세기 아시아 시대에 대비한 인재를 기르기 위해 사재를 털어 1980년 마쓰시타 정경숙(政經塾)을 설립했다. 이곳을 나온 200여 명의 졸업생은 국회의원 30명을 포함해 100여 명이 정치권으로 진출해 일본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다.

소년 시절, 배움이 적어 야학에서 가르치는 수학조차 이해할 수 없었던 마쓰시타가 무일푼으로 시작해 거대 기업을 일으키게 된 까닭은 제품이나 기술이 아니라 뛰어난 경영이었다. 인간을 이해하고 조직을 다룰 줄 알았던 그는 경영을 논리와 기법이 아니라 사상과 예술의 영역으로 승화시켰다. 그러나 마쓰시타는 역설적으로 자신을 끝없이 낮춤으로써 신의 경지에 올랐다.

‘나는 배운 것도 적고 재능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내가 경영을 잘한다거나 인재를 잘 활용한다고 평가한다. 나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한 가지 짚이는 점이 있다. 내 눈에는 모든 직원이 나보다 위대한 사람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직원들을 꾸짖을 때가 많았지만 속으로는 늘 상대방이 나보다 위대하다고 생각했다.’

장사꾼은 돈을 남기지만 큰 상인은 사람을 남긴다. 경제와 정치를 넘나들면서 사람을 남기고 떠난 위대한 상인 마쓰시타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김경준 딜로이트 컨설팅 파트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