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없는 설움을 겪어 본 사람은 안다. 높은 산이나 빌딩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세상이 언짢을 때가 있다는 것을. 고소(高所)공포증 때문이 아니다.
‘저 수많은 집 가운데 내 집은 없다니….’
셋방살이하는 서민을 보호하기 위한 ‘주택임대차보호법’이 처음 제정돼 공포 시행된 것이 1981년 3월 5일이다.
이 대표적 민생입법이 민의(民意)의 전당인 국회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12·12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신군부의 ‘국가보위입법회의’가 처리한 215개의 안건 중 하나였다. 입법회의는 1980년 10월 27일 10대 국회가 해산된 뒤 11대 국회가 구성될 때까지 156일간 국회의 권한을 대행했다.
국회사무처가 발간한 ‘국가보위입법회의 사료(史料)’를 보면 주택임대차보호법은 심각한 주택난 때문에 태어났다. 이 법의 제안 이유를 보자.
“도시 지역의 주택난은 심각한 실정으로 주택 공급률이 평균 58%에 불과하다. 전세나 월세를 사는 무주택자들은 최근 5년간 평균 2.15회 이사했고, 1년에 1회 이상 이사하는 가구도 10%에 이른다. 평균 임차 기간도 6개월 정도에 그친다.”
이 법이 주거생활 안정을 위해 최저 임대차 계약기간을 ‘1년’으로 정한 배경이 짐작된다.
그러나 이 법 시행 이후로도 전세가는 꾸준히 올랐다. 때론 이 법이 주택난을 가중시키기도 했다.
1989년 말 역시 ‘주거생활 안정’을 이유로 최저 임대차 기간을 1년에서 2년으로 늘리는 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자 ‘전세 대란(大亂)’이 일어났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1년 만에 전세가는 최고 2배로 뛰었다.
당시 시중에서는 “전세 대란과 서울 시내 연쇄방화 사건인 ‘도깨비불 소동’이 똑 닮았다”는 흉흉한 농담까지 나돌았다. 둘 다 △국민이 불안해 하지만 △그 원인(범인)은 밝혀내지 못하고 △정부의 대응은 어정쩡하기만 하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전세금 폭등을 견디지 못한 40대 부부가 8세, 7세 자녀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발생했다. 부부는 기도문 형식의 유서를 남겼다.
“정치인들, 경제당국자들이 탁상공론으로 실시하는 경제정책이 가난한 서민들의 목을 더는 조르지 않도록 그들에게 능력과 지혜를 베풀어 주소서.”
부동산 정책을 발표할 때마다 집값을 올려 온 현 정부는 이 기도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